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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Jan 16. 2022

논픽션 웨이

<크래프톤 웨이>, 이기문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대단히 명석다. 과학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했다. 카이스트에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다. 박사 과정 도그는 카이스트 선배와 함께 회사를 공동 창업한다. 회사 이름은 네오위즈. 훗날 채팅 서비스 '세이클럽'으로 유명세를 얻는 바로 그 회사다. 1997년, 그의 나이 스물 때 일이다.


"미다스의 손" "홈런 타자"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그의 발걸음은 화제였. 첫 회사를 뛰쳐나온 그는 인터넷 검색회사를 설립했다. 그 회사를 키워 NHN에 넘기고 35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거머쥐었고, 이 중 100억원을 임직원들에게 돌렸다. 그는 이 두 번의 '대박'으로 1000억원대 자산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려, 서른세살 때다.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소설 같은 이야기.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히려 우울했다. "우울해"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튀어나왔다. 하루 종일 게임에 몰두했다. 신생 벤처기업들에 투자금을 지원하고, 컨설팅을 해주는 회사를 만들어 대표 자리에 올랐지만, 우울함은 가실 생각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런 일을 하기엔 아직 젊고 생각했다.


'크래프톤' 장병규 의장

이 남자의 이름은 장병규. 한때 동시접속자 수 325만명이라는 세계적인 기록을 세운 슈팅게임 배틀그라운드를 만든 '크래프톤'의 공동창업자이자, 현재 1조원대 자산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진 사업가다. <크래프톤 웨이>(2021)는 무료하고 따분한 나날을 보내던 서른셋 장병규가 어떻게 동료들을 모았고 지금의 찬란한 성공을 이루게 됐는지, 그 성공길을 출발선에서부터 쫓아가는 논픽션이다.


우선 개인적인 배경부터. 내가 <저널리즘 논픽션 프로젝트>에 이 책을 꺼내든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처음 필자들끼리 정했던 기준, '저널리스트가 쓴' '논픽션'이라는 두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했기 때문이다. 저자인 이기문은 조선일보 기자다. 사회부와 국제부, 산업부를 거쳐 지금은 문화부에 있다. 배틀그라운드가 궤도에 올랐을 즈음 장병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써줄 사람을 구했다. 장병규의 카이스트 동문인 저자는 이 이기를 듣고 지원해 '낙점'된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이 책은 '주문제작형 논픽션'인 셈이다.


무엇보다 책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컸다. 아마 환경적인 영향도 컸을 테다. 이 책을 접한 건 신문사를 호기롭게 나와 뉴미디어 스타트업에 다닐 때였다. 공동창업자이자 투자자였던 동료가 어느날 "시간나는 사람은 한 번 보시라"며 사무실에 이 책 수십권을 가져다 놓았다. 그것이 지인이 낸 책을 무더기로 사주는 바람에 생긴 불가피한 이벤트였는지, '책 안에 담긴 인사이트를 참고하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는지는 몰랐지만, 마침 삐그덕 대던 회사 상황과 겹쳐 무척 몰입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사업이 그렇겠지만 스타트업 성공보다는 실패가 익숙하다. 구성원들의 눈은 저마다 다른 곳을 응시한다. '평생 직장'이라고 여기는 이가 없다. 내가 처음 이직 제안을 받았을 때 대표는 "한 2~3년 시도해보고 안 되면 미련 없이 접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실패가 늘 머리맡에 있었던 것. 그렇기에 구성원들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스로'성장'에 모아진다. 저마다의 비전은 시시각각 부딪히고, 시도와 실패가 8을 그리며 반복된다. 관건은 인내력이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실패를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 여기에 성패가 달려있다.


<크래프톤 웨이> '실패'에 관한 이야기다. 2017년 3월, 블루홀(크래프톤의 전신) 10주년 기념행사를 코앞에 둔 즈음 공동창업자 장병규와 김강석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었다. 행사비 9380만원이, 근속 10주년을 맞은 직원 10명에게 주는 격려금 3000만원에 허덕였다. 자금 사정이 바닥을, 직원들은 불만을 드러냈다. 회사 직원들에게 줄 월급이 2개월치밖에 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호기롭게 손을 댄 게임 사업은 연전연패, 실패의 연속이었다. 6인의 창업자 가운데 절반이 사라졌고, 전체 직원의 절반이 퇴사했다. 장병규와 그의 동료들이 얻은 소득이라 이쪽 세계에 '정답'이 없다는 오랜 진리뿐이었다. 제작자들은 저마다 확신과 기대에 차서 '게임의 재미'를 만들지만, 성적은 뚜껑이 열릴 때까지 알 수 없다. 물론 그 결과는 대체로 실패다.


하지만 게임과 달리, 이 책을 향한 호평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일간지 기자 특유의 날렵하고 단단한 문체, 위기와 극복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타이트한 전개, 배틀그라운드의 세계적 성공이라는 흥미로운 현실 배경까지. 이 책은 567페이지로 두께감이 상당하지만 스타트업 씬은 물론 언론계에서도 한동안 "재밌다"고 입소문을 탔고, 나 역시 '재밌다'는 점을 강조하며 지인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프롤로그에서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재밌게 읽히길 바란다"던 저자의 목표는 이미 톡톡히 달성한 듯 싶다.


그런데 최근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나는, 내내 이유 모를 찜찜함에 시달려야 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 선택을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꿈틀댔기 때문이다. 영문 모를 이었다. 두 번, 세 번 봐도 이 책의 스토리라인은 정교하게 짜여 있었고, 분명 재미 있었다. 언뜻 괴짜 같지만 실제로는 천재성을 가진 주인공이 각 분야 손꼽히는 동료들을 하나둘 모아 떠나는 무모하지만 낭만 있는 모험길. 절체절명의 고비들을 넘어 마침내 영광에 도달하는 이들의 대장정은, 요컨대 '모험 서사'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긴 호흡의 활자더미에 독자들을 한 차원 더 깊숙이 밀어넣는 힘은 결국 재미이고, 이 책은 장르소설이 연상될 정도로 그 전개가 흥미진진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팩트'와 '재미'라는 저널리즘 논픽션의 두 요건을 모두 갖췄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찜찜함이 떨쳐지지 않는 걸까.


잠시 책을 덮고, 그 이유를 차근차근 거슬러 올랐다. 그렇게 다다른 곳에마주하게 된 것은 이 책이 논픽션은 맞지만, 저널리즘 논픽션이 아니라는 매우 뜻밖의 깨달음이. 언뜻 비슷해 보이는 둘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이는 저널리즘이 무엇이냐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데,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우리가 고민했던 지점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어떤 책을 꼽아야 하는가. 눈을 비비고 본 세상에는 논픽션(non-fiction)이 넘쳐흘렀다. '현실'을 다룬다는 의미로만 따지면 사실상 모든 것이 논픽션이었다. 그만큼 장르도, 쓰는 사람도 다양했다. 그래서 느슨하게 정해놓은 기준이 '저널리즘이 느껴지는'이라는 단서였고, 이 역시 의미가 불명확하다보니 일단 형식을 따지기로 했다. '기자가 쓴 책'을 우선적으로 꼽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은 분명 기자가 썼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저널리즘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언뜻 두 가지가 떠오른다. 일단 이 책에 저자가 보이지 않는다. 즉, '관점'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전지적 관찰자 신분에 만족하겠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감춘다. 일어난 사건을 보기좋게 정돈하고, 서사적으로 흥미롭게 재배치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저널리즘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물론 소설이 그렇듯 작가의 문제의식을 우회적으로 작품에 드러내 것도 륭한 방법이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 그러니까 '의뢰(돈)를 받고 써준 것'이라는 배경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자신들의 실패들을 솔직하게 담았다"고, 그래서 여느 성공담과 결이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 애초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미 '성공 신화'의 문법 아래 쓰일 운명. 벼랑 끝 위기와 어처구니 없는 실수, 우연한 곳에서 찾아오는 기회들은 '드라마'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순탄하고 너른 길에 사람들이 환호하지 않는다는 건 책을 쓴 저자도, 책을 의뢰한 분명 알고 있었을 다.


그런 면에서 책 사이사이 들리는 장병규의 목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름을 가르는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진다. 보란 듯 성공한 사업가인 그는 중간중간 등장해 자신비전과 소신, 철학들을 밝히는데, 예민한 독자라면 이 책이 출간된 시점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코스피 상장을 한 달여 앞두고 신문과 방송에서 그와 동료들의 발자취를 대서특필하던, 바로 그 때다. "주모"를 절로 찾게 만드는 글로벌기업 크래프톤. 투자자들은 그들의 과거가 담긴 이 책을 넘기며 "캬, 역시.."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을지 모른다.


프롤로그와 달리, 책의 모든 것을 매듭짓는 에필로그의 주인공이 장병규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모든 것이 '성공' 정복한 사업가가 보란듯이 추켜든 전리품처럼 느껴진다고 한다면, 조금은 지나친 이야기일까? 이렇게 말하면 "집필에 있어 자유를 최대한 보장받았다"는 저자 입장에선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주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애초 그런 목적으로, 그런 설계도 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니까 말이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생각이 조금 정리됐다. 뜻밖의 소득이었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자신만의 날카롭고 비판적인 감각, 어떠한 외부 작용 없는 순수한 동기가 갈림길 사이에 있었다. 논픽션 아닌, 저널리즘 논픽션의 길이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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