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09-21 생명을 주시고 정의를 행하시는

마태복음 12:09-21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마태복음 12:09-21 생명을 주시고 정의를 행하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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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준 사건으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지만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박하지 못하자, 회당을 나가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시고 따르는 많은 이들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아직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마태는 이사야(42:1-4)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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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3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 회당에서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서 병 고치는 일이 안식일에 옳은지 여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일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양보다 더 소중하고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후 손 마른자의 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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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 옳다고 하는 이유를 양을 구하는데 그보다 더 귀한 사람이 아픈데 안식일에 그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더 적극적으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서 원하는 것처럼 제사보다 자비 곧 긍휼을 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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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주님 안에 늘 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자비를 행하며 주변에 연약한 이들을 향하여 자비를 베푸로 회복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을 온전히 성취하고 완성하신 주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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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6절 예수님은 뭇 사람들의 심신을 살리시고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나가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실을 아시고도 계속 사람들을 살리시는 사역을 변함없이 감당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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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하여 더이상 논쟁을 할 수 없게 되자 바리새인들은 급기야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이 사실은 여러가지로 충격적인 의미를 담습니다. 첫째, 율법을 맡은 이들이 율법에서 규정한 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사람을 죽이려 모의했다는 점 자체가 충격입니다. 둘째, 자신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자신들을 지키는 것인데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안식을 파괴하는 행동입니다. 셋째, 사람을 죽이려는 모의를 혼자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충격입니다. 한둘이면 실수로 볼 수 있겠지만 여럿이 함께 모의했다는 것은 과연 이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선을 도모해 가는 것이 바람직할 진대 눈과 귀가 어두워진 상태에서는 함께 멸망의 길로 치달으며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집단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고, 심지어 율법에 규정한 바를 어기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율법 해석의 한계를 예수님께서 지적한 것도 있고, 둘째로, 자신들이 그동안 가지고 온 율법에 대한 지식이 신념화 되어서 그 말씀이 옳은지 그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갖지 말아야 할 단계까지 이르러 버린 것입니다. 셋째로, 역시 그동안 자신들이 누린 율법 해석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기득권이 무너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이 무너졌기에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핍박하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들은 결국 계명의 의미와 정신은 진즉 사라지고, 신앙이든 율법이든 안식일에 대한 것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율법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다 아시고도 거기를 떠나서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의 병을 다고치시면서 당신이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아직은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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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이 확신이 되고 그것이 율법화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들,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자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자신들이 맡아 가르치고 지켜가는 율법 조항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 정신을 본질에 맞게 지켜지고 있는지 아니면 신념 내지는 종교화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토록 지키려한 전통과 신앙의 습관들은 과연 나의 욕망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미 신앙생활을 오래 한 이들일 수록 우리가 습관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갖고 있는 신앙의 지식과 기준들이 늘 유연함과 성숙을 위해 열려 있는지 함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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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1절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자이십니다.

마태는 이사야 42:1-4의 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정리하면서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로서 어떤 분이신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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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 이루기 위해서 택한 종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자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랑을 받은 만큼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장차 십자강서 이루실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가 공의(공의), 정의를 행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소외된 이들(인간의 실존)을 들어 살 수 있도록 하신 정의를 이루신 분이시기 대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투지도 않았고 말로만 하지 않았고 또한 자신을 위해 자랑하며 행하지 않고 은밀하게 사역하십니다. 그래서 길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위에서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과 달리 주님은 모든 사역을 통해서 살리는 역사를 이뤄가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비교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러한 정의와 공의를 온전히 행할 수 있게 합니다. 결국 이사야가 예언한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방인들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 오게 될 것(열방이 주께 돌아 오리라는 예언)이라는 예언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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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성취하시려고 하셨으며, 모든 것을 이루신 주님이 그토록 원하시며 또한 걸어가신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연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주님을 따른다면 오늘 우리들도 묵묵히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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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아들 예수님을 친히 택하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자로

주의 성령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언행심사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범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매일의 삶에서 선 곧 자비를 베풀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온전히 헌신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한량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에 집중하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할 수 있길 원합니다.

연약한 이들을 외면치 않으시는 하나님과

주님이 이루신 일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끝까지 공의를 행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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