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4:19-33
여호수아 24:19-33 세겜언약 - 여호와만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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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는 하나님을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며 만일 다른 신을 섬기면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멸하시리라 경고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을 다시한번 여호와만 섬기기로 하고, 그들이 스스로 증인이 되며, 세겜 언약을 갱신하고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고 율법책을 기록하며 큰 돌을 세워 증거가 되게 합니다. 결국 여호수아 엘르아살은 때가 되어 죽고 장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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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자 메시지>
오직 여호와는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우리가 여호와를 택하고 오직 한 마음으로 주만 섬기는 것이 마땅한 길입니다. _ 수 24: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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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절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는 세 번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결단을 유도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한편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거룩한 성품으로 죄와 부정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멀어져야 하며, 죄성 가득한 상태로는 하나님을 섬기기 어렵습니다.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결단과 헌신없이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 길이 제자의 길이며 한 번의 결단과 헌신이 아니라 반복적 지속적인 결단과 헌신이라야 가능합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을 보혜사 성령임을 통해 이 섬김의 길, 제자의 길이 가능하도록 도우십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섬김으로 초대하면서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신을 치워버리라 합니다. 이는 회중 가운데 있는 이방 족속들에 대해서도 언약의 백성으로 초청하는 역설이기도 합니다. 대신 다른 신들을 포기해야 하는 외적인 준비를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합니다.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는 권면(15절)에 백성들은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라고 세 번(18, 21, 24절)이라 확신하게 결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창조주, 유일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이는 세상의 많은 신들 중에 가장 힘이 센 분(단일신론)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만 유일하신 하나님(유일신론)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양다리 신앙, 두 마음을 품은 신앙들은 모두 유일하신 하나님을 향한 죄악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면서 두 마음을 품은 것이며 그는 우상숭배자요, 두 마음을 품은 죄인입니다. 그것이 욕심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사물이 되었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긴다면 그것이 우상숭배이고 멸망의 길입니다. 스스로 증인이 되어 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는 것이 이 모든 은혜에 대한 가장 합당한 반응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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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8절 하나님은 세겜 언약을 갱신하고 모든 말씀을 율법책에 기록하고 언약의 증표로 돌을 세우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결단 후에 여호수아는 언약을 갱신하고,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고,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성소 옆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증거를 삼습니다. 이 돌들이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속성, 기념이 되는 돌, 증거의 돌입니다. 그래서 세겜 언약의 산 증거가 됩니다. 이 돌들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들었다는 부분이 변하지 않는 속성을 우리 마음의 심비에 새긴 것과 같이 유비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합니다.
매일 우리 하나님을 기억하게하고, 알게하고, 순종케 하며, 우리가 바른 길로 가게하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그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하루라도 우리가 말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고, 하루라도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탐욕이 싹트고, 하루라도 이 말씀으로 정결케 되지 않으면 우리 안에 탐욕으로 점철되고, 하루라도 이 말씀을 먹지 않으면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 영혼이 됩니다. 그러나 날마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주의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살 길이고, 사는 길이며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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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3절 하나님의 은혜로 일평생 주님 안에 거하고 주를 섬기며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고 지파 경내에 묻힙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목도한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깁니다. 요셉의 뼈도 요셉 자손의 기업의 땅 세겜에 장사하고,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에브라임 산지에서 장사됩니다.
모세의 수종자로 시작했던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종으로 불리며 끝나고 있습니다. 그의 신실함을 장로들이 본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요셉, 엘라아살 모두다 지파의 기업으로 받은 땅에 평화롭게 장사됩니다. 족장 시대 애굽으로 이스라엘을 이주시켰던 요셉,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잇는 길에 동행한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은 일평생 주님만을 섬기는 삶이었고, 또 그 길을 후손들이 걸어갈 수 있도록 신앙을 전수한 이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살핌과 약속의 성취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마침내 이 생을 마감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살려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게 하신 대로 살아가며, 마침내 마감하는 그 날까지 충성된 종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사람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오늘 여기에서 우리에게 먼저 은혜 베추사 언약백성으로 살게 하신 대로, 살아내고 누리게 하신 대로, 가장 복있는 자의 길로 온전히 행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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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거룩하시고 사랑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변함없이 복락을 누리며 순종하며 살기 원합니다.
오직 우리를 택하시고 섬기라 하신대로
스스로 증인이 되어 마음을 다해
주를 섬기며, 주의 말씀을 청종하겠나이다.
주의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고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주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우리 삶에 세밀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을 상기하기 원합니다.
이 땅에서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날까지
주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일이 하나된
온전한 자로, 충성된 자로 살기 원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평안히 이 길을 가고
거룩하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순전하고 나뉘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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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묵상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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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어수선한 중에 여호수아를 묵상하면서 여느때보다 교회와 하나님나라 그리고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과 국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과 이해를 갖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여호수아 묵상에서 배운 것과 이를 토대로 시대를 분별하는 영감들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향후로 진행되는 정국속에서도 여호수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합당하게 반응하고 순종해 가면서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부르심에 충성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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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를 읽어내는 키워드는 크게는 ‘하나님의 나라’였고, ‘성전’과 ‘사방치기’ 그리고 ‘피라미드 구조’입니다.
여호수아는 호세아 예수와 더불어 ‘구원하다’라는 공통의 의미를 담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모세보다 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정복하고 분배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약속의 땅을 누리는 백성이 되도록 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고 그 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전체의 말씀을 하나님나라의 보배로운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여호수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울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정복하고 분배를 받고 살 수 있게 된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전적으로 허락하시고 이루신 것임을 통해 우리가 오늘 주의 마라 거룩한 백성됨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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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여호수아 전체의 말씀은 가나안 입성(1:1-5:12, 건너라), 가나안 정복(5:13-12:24, 취하라), 가나안 분배(13-21장, 나누라), 세겜언약과 고별설교(22-24장, 섬기라_아바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가나안 땅 전체를 성막으로 보고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으로 들어가서(성막의 입구가 동쪽)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번제와 물두멍) 아이성을 비롯하여 중부, 남부, 북부를 점령하고(금촛대) 분배하며(진설병) 마침내 세겜언약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말씀까지(지성소) 진행되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나안 땅 전체를 성전으로 본다면 여호와의 전쟁을 통한 헤렘(진멸)이 결국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땅이기에 부정한 것들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마치 제사장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기억하고 지키기 위한 장치로 땅을 제비 뽑거나, 레위지파의 성읍(48개)과 도피성을 요단 동서에 골고루 분포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지도하고, 이스라엘은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도록 했습니다. 마지막 므낫세 반지파의 갈등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이와 같이 풍성한 땅과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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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치기>
사방치기는 놀랍게도 성전의 그림과 유사합니다. 원래 사방치기의 유래는 마당을 다지거나 지신밟기와 같은 무속적 목적이 담긴 놀이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사방치기 놀이 방법과 규칙을 보면 자기 땅에선 양발을 딛어도 되고 남의 땅은 뛰어 넘어야 하고, 땅을 많이 차지하거나 상대방이 뛰어넘을 수 없어 포기하면 이기는 게임입니다. 또한 금을 밟거나 던진 돌이 금에 닿았을 때, 원래 순서가 아닌 다른 칸에 돌이 들어갔을 때는 상대방한테 기회가 넘어갑니다. 또 최고 단계인 '하늘'이라고 쓰인 칸에 가서 뒤로 돌을 던져 떨어지는 칸이 자기 땅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망을 하늘로 던지고 하늘까지 가서는 망을 발등 위에 올려놓고 위로 차올려 손으로 잡고 다시 돌아오면 땅을 따먹을 자격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규칙들을 잘 보면 이스라엘이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는 과정 속에서 수고하고 애쓰는 일들, 거룩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일들, 그리고 허락하신 땅을 제비 뽑아야 하는 일들, 그리고 이웃 지파와의 경계선을 잘 유지하고 배려해야 하는 일들과 유사한 점들이 있습니다.
은혜로 주어진 약속의 땅에서 만일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심판받은 가나안 땅의 족속들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됩니다.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방치기로 종일 땅을 따먹어도 해가 지면 모두다 마당에 두고 집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모든 땅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공개념을 가져야 했습니다. 지파의 경계도 중요하고 그런 땅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결코 더 가지려고 빼앗아서도 욕심을 부려서도 함부로 팔아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할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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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구조>
여호와의 전쟁은 희년을 선포하여 샬롬을 이루는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종교적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피라밋 계층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가나안의 우상숭배는 결국 탐욕의 산물입니다. 이로서 사회 구조는 자본(힘)과 노동력과 땅의 대부분을 극소수의 기득권 세력들이 힘과 폭력을 앞세워 갖고 있고, 대다수 소외된 이들(가난한자, 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을 상징하는)은 작은 자원을 갖고 배고프게 살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채 기득권의 착취와 유린과 폭압 속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리고를 비롯하여 헤렘을 명한 모든 일들은 결국 이러한 기득권 세력들에 대해서는 심판이었고, 포로되고 억눌린 자 가난한 이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습니다. 가나안 왕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에 저항했던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어리석은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힘없는 이들을 선동하고 동원하여 전쟁에 내보내서 자신들의 탐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런 이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쟁이 심판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된 소식이지만 가나안의 상당수는 두려워하면서 저항하여 마치 모두가 멸해지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라합과 기브온 족속 그리고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나안의 모든 이들이 진멸의 대상이 아니고 합당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살 수 있는 길이 있고, 또한 심판의 대상이 전체가 아니라 기득권 세력이며 구원의 대상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라합과 기브온은 하나님나라 구성원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쟁을 진행하면서 이스라엘은 파쇼적인 가나안의 문화와 기득권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임받으면서도 자신들도 군림하고 정복하는 자가 아니라 공평과 정의가 흐르는 하나님나라 세워가야 하는 사명자들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했습니다. 기득권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이 들어가 그들이 이전보다 더 독한 지배자로 교만하게 군림하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가나안의 심판받는 기득권 세력들처럼 살지 않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앞서 심지뽑기와 레위지파의 장치도 이 일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여호수아 5-21장에까지 수많은 지명과 경계들이 계속 언급되는 이유도 이 모든 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깊이 그리고 오래오래 새길 수 있게 하는 이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묵상하면서 대한민국의 시국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수십년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했던 사법, 검사, 경찰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된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들까지 총체적인 기득권자들이 새로운 세상과 개혁의 물결을 거스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원을 총동원하여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을 봅니다. 가나안 땅에 심판받은 기득권 세력의 말로를 본다면 이들의 몸짓이 얼마나 어리석으면서도 패역한 일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더불어 기독교 안에서도 이러한 정국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부화뇌동하는 일도 있었지만, 세습에 대한 일이나, 보수 교단들이 자신들과 다른 신학자들을 이단성이 있다고 배척하고 정죄하며 혐오를 부추기는 일들도 혼란한 정국에서 저항하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들과 별반 다를바 없이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고 세습하며 시대의 흐름에 반항하고 있는 어리석은 몸짓에 불과 합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옛 말처럼 그 알량한 권력의 힘이 아무리 오래가도 백년 남짓도 못되어 다 스러지고 말것들인데 천년만년 누릴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분별하고 정의가 세워지는 나라로 가기 위해서 가장 정의로워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합당하게 처신해야 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거룩한 백성의 삶의 방식과 언행심사를 되돌아보게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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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사방치기, 피라미드>
성막의 거룩, 사방치기의 공개념, 피라미드의 계층구조 통해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싸워 가야 할 영적 전쟁의 내용과 방향을 알게 됩니다. 거룩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 탐욕과 이기와의 싸움, 힘겨루기와 주도권 싸움등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에서,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일하고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부부든 가족이든 직장의 동료와 여러 동지들이든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이 땅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곧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나라를 세워가기 위해서 날마자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이유와 방향을 잊지 말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건너가야 할 곳, 우리가 누려야 할 것들, 그리고 우리 삶의 한계와 경계와 분수들, 무엇보다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늘 기억하면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고 있음과 우리에게 복주시는 주님이 그렇게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 부르심은 우리만을 위함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랑하며 섬기며 나누며 베풀며 공존 공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의를 행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이유는 여전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오래참으시며 심판을 유보하시고 기다려 주셨으며, 우리를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셨으며, 우리만 가지 않고 친히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길을 가시며 따르라 하셨고, 그 길을 따르는 우리를 홀로 두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성령으로 함께 하사 능력 주시고 이기게 하시마 약속하셨고, 마침내 다시 오셔서 우리가 행한대로 보응하시고 영생하도록 하신다는 그 소망이 있으니 오늘 우리가 거하는 땅에 공평과 정의의 나라, 하나님나라 이뤄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