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의 정신

쉴만한 물가 - 188호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20160423 - 법의 정신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 조치권 및 국회 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할 수 있었다. 또한, 대통령 선출 방식이 국민의 직접 선거에서 관제 기구(官制機構)나 다름없는 통일주체 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뀌었다. 유신 체제는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쥔 대통령이 종신(終身)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된 1인 영도적(절대적) 대통령제였다.”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가 위헌적 계엄과 국회해산 및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한 소위 10월 유신에 대한 설명이다. 이 유신헌법이 발효된 기간을 유신체제, 유신독재시대라고 말한다. 3권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법의 초안 작업에 참여하고,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담당 검사였으며 초원복국집 사건의 당사자이며, 국회법제사위원장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초법, 탈법, 무범, 불법, 범법을 하고도 박근혜 정부에서는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했던 이가 있다. 이러한 전력을 가지고서도 우리 시대 버젓이 초법적 권세를 쥐고 살고 있는 이가 이 나라의 통치자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 법을 1975년도에 이 법에 대한 저항이 따르자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자신에 대한 신임투표의 성격으로 발표 20일 만에 투표를 실시한다. 그러나 찬반토론 금지, 유신체제 비판 금지, 언론 통제까지 된 상황에서 이 법에 대해 제대로 알고 평가할 만한 정보가 국민에게 제대로 제공되지도 않고 실시된 투표이기에 제대로 된 평가라고 보기도 힘들다. 이러한 법의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개헌청원 운동을 하던 장준하는 그해 8월 등산 도중 의문사하게 된다. 결국 1978년 12월, 박정희는 관제 기구나 다름없는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연임에 성공하였으나, 이에 앞서 실시된 제10대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득표율에서 앞서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또한 공화당 내에서도 장기 독재에 대한 부담과 염증으로 이탈하는 인사들이 속출하였고, 미국에서도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카터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등 국제 정세 역시 박정희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게다가, 이 무렵에 불어닥친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해 중공업 중심의 국내 경제가 극심한 타격을 입으면서 박정희의 정권 유지 가능성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 부마항쟁의 처리를 두고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 부장 김재규가 강경과 온건 노선으로 대립하다 결국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는 살해당하면서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한다.


더 웃긴 사실은 2011년 3월 14일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5.16 쿠데타(5.16 군사정변) 50년 학술대회에서 미 국무부 자료를 제시했는데 이 자료에는 “한국은 박 대통령의 10월 17일 유신 계엄령 의도, 집권연장과 체제 강화 계획에 대해 미국에 알리기도 전에 평양에 통지했다”라고 적시돼 있다. 이 자료에 대해 박 교수는 "국가안보와 안정이 유신쿠데타의 명분이었지만, 유신이 평양정권의 양해 아래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담고 있다"라고 해석했다. 남북의 독재자가 서로 공생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다.


<법의 정신>이란 책을 쓴 몽테스키외는 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법이란 것이 쉽게 쓰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가급적 간결하게, 일상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의미 그대로 사용해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느 지식이나 사업이 그러하듯, 법도 어렵고 난해하다면 소수에게 독점될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법치국가에서 법의 독점과 권력의 독점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은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법은 자의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명확하되, 너무 세세한 규정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법은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변경되어야 하고, 예외나 제한, 수정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반드시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불필요하거나 지켜지지 않는 법은 법 체계 전체에 대한 존중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최근 입법부의 일꾼을 뽑는 총선과 몸담고 있는 단체의 총회에서 헌법에 대한 집행과 해석 그리고 개정과 시행에 대한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일상의 법에 대해 다시 한번 재고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탐욕이 법 정신과 법질서와 법 해석 그리고 법 적용에 대해 얼마든지 탈법 불법 초법 하여 무질서를 양산하고 공동체를 파괴할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다. 오늘 유신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이들이 버젓이 통치자로 있는 현실과, 탐욕스러운 무리들의 헌법 유린의 현실을 살아가는 한 사람, 한 국민으로 그들의 전횡을 막는 일은 법의 정신을 따라 책임과 의무, 권리와 의식을 제대로 분별, 인식, 행동, 적용하는 것이 가장 기본임을 알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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