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2:24-33
역대하 32:24-33 빈 방에 홀로 설 때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빛나는 성취가 아니라, 가장 정직한 마음의 빈 방으로 찾아와 만나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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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때로 우리를 성공의 정점으로 밀어 올립니다. 오랫동안 애써온 일들이 결실을 맺고, 주변은 찬사와 갈채로 소란합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이 된 듯, 우리는 그 성취의 빛에 취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잊기도 합니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우리 내면의 그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경계했던 ‘휴브리스’(hubris), 즉 오만은 바로 이 성공의 정점에서 자라나는 독버섯입니다.
여기 한 사람, 히스기야가 있습니다. 그는 죽을병에서 살아났고, 막강한 앗수르의 군대로부터 기적적으로 나라를 구했으며, 마르지 않는 샘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놀라운 업적을 이뤘습니다. 그의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넘쳐났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역대하 32장의 기자는 서늘한 한 문장을 적어 넣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25절). 그가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먼 나라 바벨론에서 사절단이 찾아왔을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모든 보물과 군사력을 과시합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이룬 것이 바로 나’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때, 성경은 가장 무섭고도 가장 은혜로운 한순간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31절). 하나님이 그를 ‘떠나셨다’는 것은 그를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그를 홀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찬사와 업적이라는 외투를 벗고, 사절단의 감탄 어린 시선이 사라진 '빈 방'에 그를 홀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 방에서 그는 자신의 맨얼굴, 그 교만하고 공허한 마음의 실체를 보아야 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아직 신앙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벗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성취, 심지어는 우리의 신앙적 열심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까. 삶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이 너무 잘 풀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곤 합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는 종종 이 '홀로 남겨짐'의 순간에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홀로 두시는 그 순간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속마음을 우리 스스로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질그릇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히스기야의 위대함은 그의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그가 그 빈 방에서 “그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쳤다”(26절)는 데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상을 정직하게 대면했고,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그의 삶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화려한 성공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정직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연약함으로 얼룩진 그 마음조차도 말입니다. 우리가 넘어진 그 자리,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그 폐허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의 따뜻한 시선과 한없는 사랑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유일하고도 '아슬아슬한 희망'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분의 은혜를 담는 그릇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역대하 32:24-33 연약함의 비극을 넘어, 당신의 등을 돌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애틋한 은총.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가 그분을 향해 작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장 큰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이 은총이 오늘의 우리의 길을 밝히는 희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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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간장이 들끓는 사랑, 그 비극을 넘어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님들, 그리고 인생의 순례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계실 모든 도반(道伴) 여러분께 주님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살펴볼 역대하 32장 24-33절 말씀은 유다의 히스기야 왕이 겪은 깊은 드라마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기적적인 치유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극적인 구원의 서사 이후, 그는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교만해집니다. 이 교만은 단순히 개인적인 자만심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켜 온 백성 위에 드리웁니다.
# 인간 실존, 그 뿌리 깊은 교만의 그림자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성공과 안정 속에서 쉽게 잊고 마는 인간의 근본적인 연약함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 삶의 터전이 견고해지고 모든 것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때면 우쭐한 마음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마치 풍요로움에 익숙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저버렸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총이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 착각하며 경외심을 잃고 스스로 왕좌에 앉으려 합니다.
권력의 단맛을 본 사람들이 그 권력을 내려놓는 것을 죽음보다 두려워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이룬 작은 성과를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는 교만이라는 중병에 걸리곤 합니다. 문학이나 철학에서 인간의 이기적 탐욕이 끊임없이 다루어지듯, 우리의 '골짜기 속에 있는 길'은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존재가 아닌 존재자들—돈, 지위, 성공의 우상들—에게 매달리는 허망함을 낳습니다.
# 연약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애틋한 은총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에 교만함을 뉘우치고" 스스로 겸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내리지 아니하게 하셨다".
이 대목이야말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 곧 돌이키시는 은혜의 정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고 등을 돌릴지라도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히스기야의 겸비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섰을 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창자가 들끓는 사랑(스플랑크니조마이, 함께 아파하는 사랑)이 발동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큰 나무가 되지 못했다고 책망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실패와 실수 속에 있을지라도 끝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보다, 연약한 우리를 향해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라고 외치며 종일 팔을 벌리고 서 계시는 하나님의 외로우신 사랑이 이 역대하의 본문 속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는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흔들리지만, 우리의 희망의 뿌리는 우리의 의지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신실함에 있습니다. 세상이 냉랭하다고 원망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깊은 은혜에 힘입어 우리도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따뜻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이 고통과 번민의 어둠이 스러지는 주님의 평화의 물결 가운데 거하길 기원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