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25-36
요한복음 7:25-36 아는 것의 함정, 모르는 것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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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가 가진 얄팍한 지식으로 주님을 규정짓는 오만을 버리고,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와 그분의 보냄을 받은 자의 길을 겸허히 뒤따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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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공기는 차갑고도 날카롭습니다. 명절의 소란함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두고 수군거립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요 7:27). 그들이 말하는 '앎'은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과 같은 외적인 정보에 기반한 확신이었습니다. 익숙함은 때로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작 그 이면에서 흐르는 거대한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립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합니다. 신학적 교리와 익숙한 신앙의 언어들로 주님을 우리 마음의 작은 상자 속에 가두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앎'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를 통렬하게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요 7:28). 진정한 신앙은 정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과의 실존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존재의 소리'를 듣기 위해 정적 속으로 들어갔듯, 우리도 '아는 것'의 소란함을 잠재울 때 비로소 우리를 찾아오시는 참된 분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자신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무너질 때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기회입니다. 내가 만든 가짜 신이 죽어야 비로소 참된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요 7:33)는 주님의 말씀은 이 땅의 논리에 갇히지 않는 하늘의 자유를 보여줍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세상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 그분께로 향하는 귀환의 여정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연약한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배경과 출신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하나님을 평가하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편견의 장벽을 넘어 당신의 '보냄 받은 자'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요 7:34)라는 말씀은 우리를 밀쳐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뿐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건네는 따뜻한 미소 속에, 이름 모를 이의 아픔에 공감하며 흘리는 눈물 속에 당신의 현존을 숨겨 두셨습니다. '다 안다'는 거드름을 내려놓고, '오늘 내가 만난 주님은 누구신가'를 묻는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이 우리 삶의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신비로운 사귐의 길로 우리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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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25-36 다 안다는 착각의 감옥을 부수고, 영원한 신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방황과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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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얄팍한 상식으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규정짓는 오만을 내려놓고, 때로 삶이 모호하여 방황할지라도 끝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은총의 이야기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귀환) 끊임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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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던 겨울의 칼바람이 잦아들고,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기어코 연둣빛 새싹이 돋아나는 경이로운 봄의 길목입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당연히 올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을 수도 있었던 봄이 오는 것”을 눈물겹게 맞이하는 계절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신앙의 회의 속에서 여전히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정보’가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검색 몇 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가진 파편적인 지식을 진리인 양 맹신하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7장의 예루살렘 사람들도 바로 그런 오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며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요 7:27).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피상적인 정보만으로 그분을 완전히 다 파악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알고 있는 모범답안을 확인하려 하거나,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는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앙상한 교리와 편견의 틀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렸기에, 정작 눈앞에 서 계신 생명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차가운 비아냥 앞에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요 7:28-29).
사람들의 말은 상대를 재단하고 깎아내리는 얼음장 같은 언어였지만, 예수님의 외침에는 당신을 배척하는 이들마저 진리의 세계로 초대하시려는, 펄펄 끓는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원(Origin)이 세상의 족보가 아니라 바로 그 끙끙 앓으시는 하나님의 가슴속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깊고 뜨거운 하나님의 가슴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이 의심 한 점 없는 확신의 상태여야 한다고 압박을 받습니다. 그래서 회의가 들 때면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지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묵상은 “방황과 귀환”입니다.
때로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의미를 묻고 고민하며 방황하는 것은 결코 불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대상의 진짜 의미를 알기 위해 상상력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묻는 치열한 과정입니다. 권일한 선생님은 묵상을 “이야기”라고 정의합니다. 묵상은 텍스트를 건조하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그 먼 여행의 이야기 속에 나의 남루한 인생 이야기를 포개어 넣는 일입니다. 내 지식으로 하나님을 다 안다고 교만했던 자리에서 벗어나, 알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한 주님의 이야기 속으로 방황하듯 묻고 또 물으며 돌아가는(귀환) 것, 그것이 참된 신앙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요 7:33-3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곁에 찾아오신 은총의 시간이 언제까지나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일깨우는 애달픈 초대입니다.
혹시 지금 “나는 왜 이토록 헌신하지 못할까?”, “나는 왜 이리도 부족할까?” 하며 스스로를 탓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더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려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완벽한 성취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은총 안에 우리 존재를 푹 담그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다 안다는 착각,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의 짐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읍시다. 신앙은 도덕적 숙제를 해내는 것이 아니라, 낯설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사랑에 나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모호한 현실 속에서 때로 방황할지라도, 끝내 우리를 안아주시는 주님의 온기 속으로 날마다 새롭게 귀환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커다란 나무의 ‘나이테(Annual Ring)’를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햇살이 따스하고 비가 넉넉한 봄여름에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춥고 메마른 가을과 겨울의 혹독한 시간도 고스란히 제 몸에 품어 단단한 띠를 만듭니다. 신앙의 확신으로 충만했던 기쁨의 시간뿐만 아니라, 회의와 의심으로 방황하던 춥고 낯선 시간들조차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는 우리 영혼을 더 굵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아름다운 ‘은혜의 나이테’로 완성되는 법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