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01-16
요한복음 11:01-16 죽음의 절망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완벽한 섭리의 때를 따라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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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자,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 위급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선언하시며,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이후 유대로 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했던 위험을 상기시키며 만류합니다. 예수님은 빛 가운데 걷는 자의 안전함을 말씀하신 뒤, 나사로가 '잠들었다'며 그를 깨우러 가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이를 육신적인 수면으로 오해하자,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음을 밝히시며 도리어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기뻐하십니다. 이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며 비장하면서도 비관적인 결의를 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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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본문의 배경이 되는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마을로, 그 이름의 뜻은 '가난한 자의 집' 또는 '고통의 집'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과 거주지는 당시 로마의 압제와 가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연약한 민초들의 삶을 대변합니다.
# 신학·정경적 배경 :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번째 표적이자 가장 절정에 달하는 최대의 표적입니다. 이 사건은 곧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장 선명하게 예표하며, 예수님이 생명과 사망의 절대적 주관자이심을 증명합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는 것은 훗날 깨어날 부활의 때가 있음을 확증하는 기독교의 독특하고도 위대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 철학·인문학적 배경 : 본문은 인간의 '시간(Chronos)'과 하나님의 '때(Kairos)' 사이의 철학적 긴장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당장 눈앞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조급해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더 큰 목적과 영광을 위해 침묵과 지연(Delay)을 선택하십니다. 죽음을 인생의 끝(절망)으로 보는 인간의 유한한 인식과, 죽음을 영광을 위한 과정(잠)으로 보시는 창조주의 시선이 날카롭게 교차합니다.
#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질병과 실패, 그리고 죽음이라는 짙은 어둠으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요한복음 11장 전반부의 말씀은,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과 죽음의 자리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대로 바꾸시는 생명과 부활의 주님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두려움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시간표를 신뢰하는 깊은 은혜를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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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질병
인생의 치명적인 시련과 질병조차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기회로 삼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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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마르다는 사랑하는 오라비 나사로가 중병에 걸리자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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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고통의 집)'에 사는 '나사로(하나님이 도우신다)'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축소판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죽을병은 비극의 끝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은 그 질병의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재해석하십니다. 시련이 당장은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그 찢어진 상처의 틈 사이로 당신의 살아계심과 구원의 능력을 찬란하게 드러내십니다. 고통은 파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영광의 재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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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와 같은 중병(위기)을 앓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자매들의 호소처럼,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예기치 않은 시련은 닥쳐옵니다. 그러나 절망의 늪에 빠지지 마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눈물과 위기를 보시며 "이것은 너를 망하게 할 병이 아니라, 내 영광을 드러낼 기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에 해석되지 않는 고난이 찾아올 때, 원망을 멈추고 "하나님, 이 시련을 통해 어떤 영광을 받으시렵니까?"라고 묻는 믿음의 시선의 전환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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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절 사랑하시기에 지체하시는 주님
인간의 조급한 시간표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더 큰 믿음과 기적을 주시기 위해 가장 완벽한 당신의 '때'를 기다리시는 섭리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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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를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며 지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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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과 6절 사이에는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역설이 존재합니다. '사랑하셨다'면 즉시 달려가 고쳐주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체하신 것은 무관심이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큰 계획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틀을 더 지체하심으로 나사로는 완전히 죽어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0%가 된 절망의 상태, 즉 인간의 끝(End)이 하나님의 시작(Beginning)이 됨을 보여주기 위한 신적 지연(Divine Delay)이었습니다. 주님은 얄팍한 문제 해결을 넘어, '부활'이라는 압도적인 기적과 믿음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완벽한 때(Kairos)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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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빨리빨리"가 미덕인 대한민국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이 조금만 지연되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 지으며 실망합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하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침묵과 지연은 거절이 아닙니다. 더 큰 은혜, 더 큰 영광을 주시기 위한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조급증은 믿음의 가장 큰 적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표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섣불리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신뢰하며 평안히 기다리는 성숙한 인내를 배우시기를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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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0절 빛 가운데 걷는 자의 담대함
세상의 위협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진리의 빛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며 걸어가시는 생명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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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은 방금 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극구 말립니다.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없으므로 실족하느니라"고 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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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예루살렘(유대)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위협(돌)'이라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과 밤', '빛과 어둠'의 비유를 통해 영적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낮'이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상태를 뜻합니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낮의 시간(사명)이 끝나기 전까지는, 세상의 어떤 세력도 빛이신 예수님을 해칠 수 없습니다. 사명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실족하지 않으며, 죽음의 위협조차도 그 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거룩한 당당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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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사회나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과 진리를 지키며 살아갈 때,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날아오는 '돌(비난, 손해, 위협)'을 맞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제자들처럼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회피하고 타협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뜻(빛)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의 '낮'을 걷고 있다면 세상은 결코 우리를 영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세상의 권력이나 직장 상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장중 안에 있습니다. 빛의 자녀답게,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영적 배짱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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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6절 죽음을 잠으로, 절망을 믿음으로
인간의 죽음을 부활을 향한 '잠'으로 규정하시며, 제자들의 영적 무지 속에서도 참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일하시는 부활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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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며 그를 깨우러 가겠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육신적인 수면으로 오해하고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자, 예수님은 비로소 "나사로가 죽었다"고 명확히 밝히십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도마는 동료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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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상실이요, 영원한 이별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창조주이신 예수님께 죽음은 단지 다시 깨어날 수 있는 '잠'에 불과합니다 (살전 4:13-14). 인간의 한계에 갇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영적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참담한 죽음의 사건조차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의 주님이심을 '믿게 하는' 영적 훈련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한편, 도마의 발언("죽으러 가자")은 예수님을 향한 의리와 충성심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짙은 비관주의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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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철학과 인문학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허무와 소멸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을 향한 '단잠'일 뿐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도마처럼 우리도 세상을 바라보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나사로의 죽음과 같은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올 때, 인간적인 오해와 비관에 머물지 마십시오. 주님은 그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 한복판에서 "너희에게 참된 믿음을 주겠다"고 기뻐하십니다. 십자가 너머의 부활을 바라보는 이 확고한 믿음만이,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 가정을 지키고, 우리 교회를 살리며,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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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생명과 부활의 참된 주인이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유한한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수많은 고통과 질병,
그리고 절망의 순간들 앞에서도,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때때로 우리의 조급함 때문에,
이틀을 더 머무시며 가장 완벽한 때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원망했음을 회개합니다.
질병과 죽음의 어둠 앞에서도
그것을 끝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다시 깨어날 '잠'으로 선언하신 주님,
오늘 땀 흘리는 일터와 수고로운 가정 속에서
힘겨워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부활의 참된
산 소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던지는 돌멩이와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 숨지 않게 하시고,
빛 되신 주님과 함께 사명의 낮을 당당히 걸어가는
거룩한 용기를 주시옵소서.
인간의 비관적인 시선을 넘어,
절망을 믿음으로 바꾸시는 부활의 주님을 굳게 붙잡고,
오늘도 생명의 빛 가운데로 힘차게 전진하는
모든 믿음의 권속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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