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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Sep 23. 2017

예레미야 05:01-09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렘 05:01-09

예레미야 05:01-09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하나님은 정의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한 사람도 없음을 고발합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영적인 무지와 완악함을 고발하면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됩니다. 결국 유다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심각한 범죄였습니다. 


1-2절 하나님은 진실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이 성읍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거짓 맹세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음행과 부패로 물들어 가는 범죄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에 유다의 대표적인 도성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만 있어도 예루살렘 전체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의는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온전한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5절에서는 ‘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진리는 왕되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할 수 있습니다(2절의 거짓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결국 정의와 진리의 길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며, 앞서 진실과 정의와 공의(4:2)를 추구하는 삶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사람, 이 세대에 물들지 않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하는 이들(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는데 정작 그들은 말만 그럴 뿐 실제 삶에서는 정의의 열매와 진리의 추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말만 할 뿐 행하지 아니하므로 그들의 맹세는 가식과 거짓과 헛된 것일 뿐입니다. 예루살렘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각한 상태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세대 가운데서도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이를 찾고 계실 줄 믿습니다. 소외된(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이방인, 가난한 이들 등등) 이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고, 탐욕을 따라 바알을 섬기며 돈과 권력과 힘이 최고인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길을 제시해 주시고, 주님을 바라며 살아갈 소망 주신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그것이 진리를 구하며 살아가는 이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 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우리도 시류에 휩쓸린 거짓 맹세 하는 허다한 무리에 섞인 이들이들일 뿐인가요?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3-6절 진리 곧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아는 것 뿐 아니라 행하는 자라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진리를 구하는 이들을 찾지만 예레미야가 보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인에 무감각하여서 아픔도 징계도 회계도 싫어할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비천하고 어리석어서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함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라도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들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걸림돌(멍에, 결박)로 여겨 끊어버립니다. 그렇게 허물많고 반역한 이스라엘을 기다리는 것은 사자와 이리와 표범같은 심판의 도구로 말미암아 죽음과 멸망과 찢김만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의 채찍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런 요동도 반응도 할 수 없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얼굴을 굳게 하여 돌아오라는 말씀에 무색하게 아예 싫다고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멍에와 결박으로 생각하며 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속박으로 알고, 방종으로 치달아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이 비천하고 어리석기에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아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 먹고 살기에 바빠서 여호와의 길과 법을 아는 일에 게으르고 무관심하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우선순위에 여호와의 길과 법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탐욕의 산물인 우상입니다. 


호기 지도자들은 여호와의 길과 법을 알고 있다고 해서 보았지만 어느새 그들은 여호와 길과 법에 대해 순종의 길이 아닌 반역의 길로 행합니다. 급기야 여호와의 길과 법을 자신들을 옭아매는 멍에와 결박으로 치부하고 끊어버리기까지 합니다. 비천한 이들과 달리 여러모로 지도자들(상층민, 부유층, 관료나 제사장이나 유지들까지 <> 비천한 자들과 대조되는 자들이다)은 여호와의 길과 법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들은 여호와의 길과 법을 끊어버립니다. 이는 반역에 속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자와 사막의 이리와 표범이 이들을 죽이고 멸하고 찢어버리는 죽음에 넘겨 질 것을 예언합니다. 아무도 이 심판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역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허물(범죄)과 반역(배반)이 너무도 중하였기에 심판 또한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잘 아는 자만이 여호와의 징계와 경고와 뜻을 추구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길 원하는 모습을 가집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을 지라도 곧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할 지라도 주님을 알아가고 순종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이가 결국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무지하고 다른 주인을 섬기며 살아간다면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갈 뿐더러 여호와의 길과 법이 아닌 욕망의 포로로, 멸망의 길로, 죽음의 길로 갈 뿐입니다.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아는 일에 곧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로 온전히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7-9절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른 역사의식과 윤리적 가치를 따라 살길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여호와께서 돌보셨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음하고 창기의 집에 허다하게 모였습니다. 발정난 수말 같이 이웃의 아내를 범하는 죄를 버젓이 범합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해서 유다의 범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타락은 결국 윤리적인 부패로 귀결됩니다.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윤리적인 삶은 헛된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바알 종교에는 ‘윤리와 역사’가 없기에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이 윤리적으로 타락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따르는 이들은 역사 속에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계시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제의 규정과 지침들로 제시하시고 가르쳐 주셨기에 여호와를 따르는 거룩한 백성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윤리적 삶을 추구하는 가치는 신앙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셔서 오늘까지 인도하셨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하시고 인도해 주셨는데 정작 그런 은혜로 부요케 된 이후에는 감사와 합당한 고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허탄한 데 눈을 돌려서 여호와가 아닌 신을 섬기고 신앙과 윤리적인 간음을 서슴지 않으며, 심지어 두루 다니면서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이러한 반역과 패역, 음행과 간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거룩한 백성이 부정을 저지른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겠습니까?


언약은 은혜의 경계입니다. 여호와께서 베푸신 은혜와 함께 회복된 관계속에서 이제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신부로 살아가기로 계약한 우리가 그 약속을 깨뜨인다면 그 삶에 어찌 평안과 안전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긍휼과 상과 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복을 세어보면 주님의 자녀로서 받은 사랑과, 주께서 공급하시므로 필요를 채우시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하신 은혜와,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우리에게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을 소망가운데 알게 하신 것은 일평생 주를 위해, 주를 따라, 주를 바라고, 주를 믿으며, 주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이유로 이미 넘치고도 넘칩니다. 오늘 나를 살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하나님이 벌과 심판을 초래하는 삶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이길 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길이요 삶의 이유이시며 

정의와 진리를 행하는 이를 찾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자녀와 백성답게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길과 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비천하든 부요하든 어떤 상황 처하더라도

항상 주의 길과 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날마다 주와 동행하고 소통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를

즐거이 행하는 복있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주께서 대적들을 도구로 쓰게 해서

벌과 보복을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마음을 시원케하고 주의 뜻을 이루며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바르게 알 뿐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도 사랑의 주님처럼 

그렇게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오직 주를 따라 주만 바라며

배부르고 부요케 되거든 그것을 허락하신 주를 따라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또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으로

올곧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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