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02:17-29
로마서 02:17-29 유대인들의 문제 - 껍데기는 가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이들에게 결국 최종심판으로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지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비록 율법을 가졌으나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고, 이방인이라도 율법을 지키면 참 유대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 한 줄 묵상 : 우리가 아는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될 때 그것을 온전함이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칭찬받는 삶이다.
# 행위 보응의 원리가 율법에잘 나와 있다고 언급하니 그 율법을 가진 유대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율법의 관계 그리고 유대인의 유익의 문제와 책임 소제 등에 대해 디아트리베 논법 통해서 논제 제시하고 의문에 답변하며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1:18-3:20까지 논지>
1:18-2:16에서 논제인 율법을 제시하고,
2:17-3:8에서는 질문과 답변을 한 후에
3:9-20에서 1:18~3:8까지의 내용을 정리한다.
17-20절 우리의 사귐과 분별과 확신과 이해는 온전한 것인가?
유대인은 율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의지하고 자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분간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도자요, 빛이요, 율법에 있어 모범이고 교사요 선생이라 스스로 믿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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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자랑 또는 신앙하며, 율법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을 분별하는 일은 맞는 말입니다. 말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분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맹인과 어둠가운데 있는 자의 길을 인도하고 또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그런 자라고 믿고 있고, 율법의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라고 자부하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어서 문제를 삼는 부분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것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지혜있다 하지만(롬 1:22) 문제는 그것이 온전하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율법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지혜있다 할 수 없고, 그것을 안다고 하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오해와 왜곡과 편협함과 이기적인 해석과 이해로 정작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확신을 갖고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하는 착각과 하나님의 선민이라 하는 확신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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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에 대해서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성경을 통달했다거나 하나님이 이런 저런 분이시라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역사한다고 자랑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런 하나님을 누군가에게 가르치고 훈계하는 일에 대해서도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계시하시고 깨닫게하셔야 온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만과 외식과 위선의 위험성을 늘 염두하면서 겸손히 말씀앞에 나아가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며 듣고 먹고 깨달아 온전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21-24절 우리의 온전치 못함은 하나님이 모욕당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갖고 있고 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율법의 진리와 모본을 따라 다른 이들을 교훈한다고 했는데 정작 자신들은 그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우상을 숭배하기까지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급기야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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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앎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어느새 자만하여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여 결국 율법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인 계명을 스스로 어기고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 계명을 받은 이후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행한 역사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으로 도둑질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믿으며 심지어 우상까지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했으면서 결국은 그 율법의 교훈들과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율법을 범하게 되었음에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오히려 더럽혀져 있기에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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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자가 되기 전에 배우는 자여야 하며, 설교하기 전에 그 설교를 자신이 먼저 들어야 하며, 묵상한 말씀은 내가 먼저 듣고 순종해야 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말씀을 맡은 자들이기에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그 말씀을 먼저 읽고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힘써야하고, 누군가를 가르치기보다 스스로에게 그 말씀이 적용되게하고, 자신을 말씀의 검으로 스스로 쳐 복종케 하는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온전함을 추구하는 일이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시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으로 빚어져 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25-29절 우리의 온전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습니다.
율법과 할례의 관계를 통해서 겉사람이 비록 율법을 지키는 형식을 지녔다 할 지라도 속사람이 율법을 따라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참 유대인과 참 할례는 겉사람 뿐 아니라 내면의 변화 곧 전인적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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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통해 말씀하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형식주의, 겉치레와 외식주의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종교적 형식과 제의 그리고 여타의 절기나 규례를 지켜가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형식과 제의와 절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전인의 변화와 성숙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며, 결국은 율법 자체를 제대로 지킨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알고 믿고 행하는 것이 일치된 것이 온전함이며, 외면과 내면이 전인적으로 변화된 것, 몸과 마음이 일치되게 거룩함으로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을 갖고 있고 알고 있기만 하면 그것이 자신들을 살리고 선민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착각한 문제를 언급한 것입니다. 이를 할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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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난은 왜그렇게 기독교인은 이기적이고 더 탐욕스럽고 고집스럽고 외골수이며 더 악하고 더 사랑하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쉽게 하는 말들이 ‘교회만 다니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목사면 뭐하고, 장로면 뭐하고, 집사면 뭐하냐고 예수도 안믿고 교회도 안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못된 모습들이 태반이라고 하며 급기야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의 온전치 못함이 하나님까지 모욕을 당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비난이며, 핍박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면박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없듯이 우리의 내면까지 보시는 하나님의 눈도 속일 수 없습니다. 가면을 벗고, 외식을 벗고, 알고 믿고 행하는 것이 일치된, 겉과 속이 일치된 온전함을 추구하며 살기 원합니다.
# 기도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거룩함을 빚어가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바르게 알고 의지하며 선악을 분별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가르치기보다 스스로 배우며 확신한 일에 먼저 거하고
겸손하게 말씀앞에 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그 말씀으로 자신을 쳐 복종시켜 가기 원합니다.
외식과 자만을 버리고, 겉과 속이 동일하며
알고 믿고 행하는 것이 일치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시는
주님의 마음과 손길을 겸손히 받아
날마다 온전함으로 잘 빚어져 가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잘 듣고 바르게 깨닫고
그 말씀의 뜰을 따라 순종하여
말씀의 능력 덧입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