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Mar 25. 2019

마태복음 20:17-34 예수 따름의 눈을 뜨라

마태복음 20:17-34

마태복음 20:17-34 예수 따름의 눈을 뜨라


예수님은 세번째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어머니는 아들들의 자리를 청탁하며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신다 장담하지만 다른 제자들의 공분을 삽니다. 이에 예수님은 인자가 섬김과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 오셨음을 밝히십니다. 이어 큰 무리 가운데 맹인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 17-19절 인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면서 열 두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인자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념겨져 수난과 죽음과 부활하실 것이라고 예언해 주십니다. 

*

이제 예루살렘을 오르는 예수님은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곳으로 올라갈 것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이제 더욱 구체적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자신을 이방인들에게 넘져 주어서 죽이기로 결의하고 조롱하며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여 죽으시고 마침내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와 삼일만의 부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길을 향해 멈칫함 없이 걸어가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부분에 탐욕스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20-28). 이번에 벌써 세 번째 수난 예고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잘못된 확신과 오해에서 비롯된 헛된 망상으로 주님의 이야기는 더이상 그 의미도 깨닫지 못하고 듣지도 않고 보지도 못하는 영적 소경된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한번 뒤이어 다뤄지는 이야기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한 여정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따르고 있지만 주님은 망설임없이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것처럼 열두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 일을 이르신 이유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과 자신이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당위성과 사명을 잊지 않고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에게 선포하시면서 기어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증을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 중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다시 세 사람만 따로(26:37) 데리고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예고와 선언을 통해서 끝까지 자신을 쳐 복종 시키시면서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끝가지 이뤄가신 것입니다.  


# 20-28절 인자 예수님은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수난 예고 후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제자들이라 하지 않고) 예수께 와서 창탁합니다. 주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주님이 마시는 잔이 무엇인지, 열어가실 새로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이들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제자들은 주님이 마신 잔을 동일하게 마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두 형제에 대해 분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세상 고관들의 권력남용과 탐욕에 대해 지적하시고 제자들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19:27-30에서 새로운 세상에서 제자들이 얻을 보상과 보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가 와전되었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가족들에게 제자들이 전했을 때 더더욱 그들은 오해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까지도 오해하였듯이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의 의미와 지금 가시는 길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이제 새로운 세상은 로마를 몰아내고 다윗시대의 영광을 되찾는 새로운 왕국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런 세상이 오면 가장 높은 좌우편 자리에 자신의 아들들을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리에 제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듣고 있는 다른 제자들이 분을 내고 있는 것은 그들 또한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앞으로 가셔야 할 수난에 대한 예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을 마셔야 할 잔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구하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는 것과 주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하에 달려 있습니다. 어쩌면 가깝게는 십자가의 좌우에는 다른 이들이 달립니다. 덧붙여 예수님은 이후에 제자들이 지금 자신이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될 것에 대해서도 예고하십니다(23절). 이는 부활 승천 후에 제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가게 될 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아직 부족한 제자들이지만 이후에 자신을 팔 자도 있으나 자신을 따를 제자들도 있을 것임을 예견하시면서 격려하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자리를 탐하는 이들의 모습이 세상의 집권자들이나 하는 일이며 그렇게 탐욕과 권력 남용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습과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여야하고, 으뜸이 아니라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제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동시에 주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섬기려는 자가 된다는 것은 이후 최후의 만찬에서도 다시한번 제자들에게 제시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들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드려서 구원하시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주님을 증거하면서 뭇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할 것인데 이를 섬기는 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

지금 주님을 따름이 무엇을 위함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의 군림하는 왕, 집권자들처럼 권력을 탐하고,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위함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온전하게 서고 살기 위함인지, 출세과 헛된 번영과 영화를 위함인지, 고난없는 영광이나 보상을 위함인지 냉정하게 살펴 봐야 합니다. 믿음과 신앙과 종교행위를 빙자해서 마음속 탐욕스런 욕망을 가리고 위장한 채 주를 위해 헌신하는 양 기만과 위선으로 가득차 있진 않는지도 돌아봐야 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이 누구보다 나의 신앙의 모습들과 목적들을 적나라하게 보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까운 이들이 인정할 만큼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참으로 크고자 함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으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섬기는 삶을 살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고,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는 제자로 살고 있는지요? 말씀을 많이 안다고, 예배를 많이 드린다고, 좋은 설교를 듣고 화려한 예배화 교회를 다닌다고, 그것이 나의 믿음이고 나의 신앙이고, 나의 삶과 일치한다고 볼 순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삶이 일치되는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일평생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인데 잠시라도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거침없이 밀려오는 위선과 거짓된 탐욕과 유혹이 금새 온전으로 달려가지 못하게하고 넘어지게하고 헛된 길로 눈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새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 주셨으니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변합없이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온전한 신자이길 원합니다. 


# 29-34절 예수님은 소경된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리고를 떠나갈 때에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 때 맹인 두 사람이 주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길 구하는데(키리에 엘레이손,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리들이 구짖어도 잠잠하지 않고 계속 요청하시니 예수님이 그들을 불러 긍휼을 베풀어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눈을 뜬 그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

갑자기 큰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고 눈을 뜨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들은 무리들의 꾸짖음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면서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구하는 것은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맹인들의 외침은 예수님이 왕적인 메시아이심을 외치고 부르고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앞서 수난의 예고와 섬기는 자로 대속물로서의 인자의 모습을 예고한 이후에 나온 고백입니다. 예수를 따르고 있는 큰 무리들, 이들을 만류하며 꾸짖는 무리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제자들도 아직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이신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보지 못하는 소경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부르고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정작 눈을 떠야 할 이들이 누구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

큰 무리들과 제자들은 아직은 영적 소경된 이들입니다. 이들이 구하는 것은 탐욕의 권좌였지만 두 맹인이 구한 것은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눈이 떠지는 것과 동시에 영적이 깨달음을 얻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이제 주님이 열어가시는 새로운 시대는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앞 못 보던 이들이 눈이 열릴 것에 대한 역사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지금 이렇게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려지고 그 절정을 향해 주님이 가시고 계시며 이러한 시대를 열어가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눈을 뜬 소경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 말씀은 제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두 소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 기도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보내사

대속물로 삼아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그 놀라우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당하신 수난과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들을

다시한번 깊이 되새기며 그 큰 사랑을 기억합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 주님이 마시리라던 그 잔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집권자들처럼 헛된 권세를 탐하지 아니하고

주어진 힘을 남용하거나 군림하지 않으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섬기는 자로, 종으로 그렇게 주님 따름이 되길 원합니다. 

탐욕에 눈멀어 주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자꾸만 세상의 길로 가려는 우리를 깨워주시고

주여 제 눈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하시고

주님 가신 그 길을 똑바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을 따름의 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눈 뜨고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아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하옵소서. 

매거진의 이전글 마태복음 20:01-16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