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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Apr 11. 2019

마태복음 25:31-46 심판 6 _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31-46

마태복음 25:31-46 심판 6 _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강화 마지막 부분입니다. 24-25장의 심판에 관련 된 말씀의 최종 결과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주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서 모든 민족은 각각 구분되어 보좌 오른편과 왼편에 서게 있게 됩니다. 오른편은 복 받을 자들로 예비된 나라(영생)에 들어가고, 왼편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 영원한 불(영벌)에 들어가게 됩니다. 


# 목자와 임금의 이미지는 서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목자는 긍휼로, 임금은 통치와 심판을 행하시는 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목자되신 주님과 왕되신 주님에 대한 뉘앙스는 이렇게 온도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사랑과 공의의 주님이 신실하심을 믿기에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경성과 누림사이의 긴장들을 늘 갖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기준인 ‘지극히 작은 자’와 ‘내 형제’는 누구이며, 이들을 향한 행위가 영벌과 영생의 결과를 달리 한다면 이를 행위구원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를 정리해 보는 것도 중요한 묵상의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 본문 해석에 고려해야 할 배경 단상 

24-25장의 예루살렘 성전 멸망과 재림에 대한 말씀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배경을 염두할 때 그 메시지가 좀 더 분명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당시의 상황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의 비장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강화를 통해 제자들을 비롯한 천국 백성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믿음의 여정을 교훈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태복음의 기록 시기를 주후 80-90년대 정도로 본다면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64년 네로의 박해 이후 90년대 도미티안 황제의 두번째 박해를 앞두고 여전히 로마 치하의 엄혹한 시기를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상황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신념과 신앙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무너지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러한 사건에 대한 이해와 정리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이후 삶의 목적과 내용이 좌우됩니다. 이전에 기원전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포로기와 포로 후기에 회고하며 재해석하고 교훈삼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미국도 9.11사건 전후가 달랐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러한 역사적 전환점들이 많았습니다. 가깝게는 4.16세월호 사건에 대한 부분도 여전히 진실규명이 덜 된 상태이지만 이에 대한 교훈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해 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이후의 삶의 방향과 내용 그리고 삶의 자세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독립한 적이 없습니다(지금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은 성경의 이스라엘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주님은 교회 곧 그리스도인들로 새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약속의 땅으로 왔을 때부터 늘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리고 강대국의 지배 하에서 하나님나라 백성과 공동체로 살아왔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일에는 항상 환난과 핍박이 지속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속에서 세상과의 싸움과 전쟁과 갈등의 역사가 구약의 역사이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도 지속되고 있으며 마태 공동체에게도 여전히 살아가야 할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이제 AD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한 팍스로마나의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재해석과 종말신앙(개인과 우주적인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엄혹한 현실 속에서 변함없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힘과 원동력이 될 수 있었기에 마태는 다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회고하면서 해석하고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들을 함께 고려할 때 마태복음 24-25장의 이야기가 2천년 전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앞선 이야기도 오랜 역사를 회고하며 예언의 성취의 관점들을 계속 재확인하는 것도 당대의 현실을 해석하고 살아가기 위한 이유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로마 같은 세상 속에서, 세상의 주류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세속에 휩쓸려 가느냐, 역류하느냐 아니면 선도하고 주도해 갈 것이냐의 싸움이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다시금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에 대한 말씀이 과거의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은 우리와 거리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아내야 할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묵상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 31-33절 경성&준비해야 할 이유 9 : 마침내 주님 앞에서 심판 받아 구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을 모아 각각 구분해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좌우로 구분하는 것처럼 세울 것입니다. 

*

인자 곧 예수님께서 목자되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메시아 되신다는 사실을 줄곧 증거해 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재림에 대한 교훈을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에 심판이 있고 그 때에는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을 따라 분명하게 두 부류로 나뉘어 질 것에 대해 말씀하신대로 다시금 분명하게 좌우로 나뉠 것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비유해 주고 계십니다. 

양과 염소는 그리고 오른편과 왼편의 상징은 주로 흰색 양은 의인으로 검은색 염소는 악인으로 상징됩니다. 오른쪽은 대게 명예와 긍정적인 의미로, 왼편은 그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목자는 제 양을 알고 염소 또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인과 악인에 대한 구분을 주님의 판단 기준을 따라 정확하고 분명하게 하실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

그동안 계속 경성과 준비해야 할 삶의 이유들을 정리해 왔습니다. 결국 종말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염세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오늘과 오늘 주어진 현실의 삶을 더 책임있게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고, 우리로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으며, 주님의 즐거움을 동참케 하셨고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천국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 이유와 소망을 충분히 주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니 어려움과 염려와 근심의 이유들이 차고 넘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대하면서 오늘을 감당하고 이겨 나갈 힘을 얻어 책임있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목자되시는 주님이 함께 하사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 34-40절 경성&준비해야 할 이유 10 : 의인들에게 예비된 나라(영생)를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때에 주님(임금)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복받을 자들로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 받을 것이라 판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도와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묻는 의인들에게 주님은 주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복’과 ‘예비한 나라’와 ‘영생’(46절)은 결국 같은 의미로 구원 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선 비유에서는 ‘혼인 잔치’와 ‘주인의 즐거움’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을 상속받는 이유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소외된 이들 곧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들의 모습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에서는 묘사된 상태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된 것까지는 앞선 소외된 이들의 모습과 유사하지만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것은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옥에 갇히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여정에서 이와 같은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작은 자’는 앞서 마 10: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에서도 언급된 제자들로 보입니다. 주님은 또 40절에서 이들을 ‘내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서 마 12: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10:40에서는 “너희를 영접하는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역시 제자들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과 동일시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자’는 일반적으로 세상의 불쌍한 이웃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인간들을 다 포함한다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주님의 제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웃 사랑에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만 사랑해야 한다고 국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에 있는 이웃들의 아픔에도 당연히 동참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이제 환난과 핍박을 앞둔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고 그 길을 가는 이들을 교회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교훈하기 위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한 선행이 영생과 구원을 얻는 조건이라고 한다면 그럼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을 얻는것이냐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작은 자에 대한 이해가 주님의 제자들이고, 결국 이들을 향한 선행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이를 행위구원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선행은 결국 믿음의 양면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얻은 천국백성은 당연히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행을 수반하는 삶을 통해 믿음의 열매를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악인의 모습은 앞서 주여주여 하는 자들과 같은 말과 행위가 다른 곧 열매가 없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

지금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며,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혀 있는 것같은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따르는 과정 속에서 이런 일을 겪는 것이라면 주님의 제자요 형제로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맡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또 이러한 이웃이 있나요? 그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붙여주신 사람들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할 기회, 제자임을 증명할 기회,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실 사람도 붙여주셨고, 사랑을 줄 사람도 붙여주신 줄 믿습니다. 영생의 상속자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 41-46절 경성&준비해야 할 이유 11 : 악인들에게 예비된 영원한 불(영벌)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판결합니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들에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에게는 영벌에 들어가리라 선언하십니다. 

*

이 사람들은 앞서 7:21-23에 나온 이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래서 44절에 주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이 언제 주님을 향하여 선을 행하지 않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 10:15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미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핍박하고 돕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영벌에 처해질 저주받을 자들입니다. 자신들은 나름대로 주를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구분하신 것입니다. 앞선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

위선과 외식 곧 자신들이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의인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위선, 그리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내면과 일상에서는 불의를 행하며 믿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른 외식에 대한 심판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영벌입니다. 이는 위선과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이면서, 그런 이들의 핍박속에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는 우리들 또한 위선과 외식을 유의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하지도 않는다면 더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는지 아니면 경고가 되는지는 각각 자기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들려진다면 지금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 기도

우리의 목자요 왕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내용을 따라 마침내

주님 앞에서 구분되어질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로 

주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도록 

목자와 같은 사랑으로 함께 해 주심을 감사하옵고

왕되신 주님의 통치와 뜻을 따라서

거룩한 자녀로 살아갈 길을 인도해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소외된 우리를 긍휼히 여겨서

천국 백성 삶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

천국가족들을 향한 사랑으로 증명됨을 배웁니다. 

주님이 붙여주신 작은 자들을 향하여

아낌없이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온전한 믿음 주시옵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랑의 능력도 허락해 주옵소서. 

천국백성의 여정의 끝에서 결산하는 것을 기억하고

지금 곁에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넉넉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도

풍성하게 부어주시옵소서. 

이웃을 향하여 주께 하듯

아낌없이 최고의 것으로 사랑할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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