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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14. 2022

요한복음 05:01-15 예수님은 자비와 치유의 주이십

요한복음 05:01-15 

요한복음 05:01-15 예수님은 자비와 치유의 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양문 곁 베데스다에서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시며 참 안식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날이 안식이라 유대인들은 치유받은 이를 추궁하며 누가 그를 치유했는지 묻지만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다가 이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유대인들에게 가서 고합니다. 


# 1-5절 자비의 집(베데스다)에 정작 자비가 없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첫 번 표적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축제를 회복시켜 주러 오신 분으로 묵상했습니다. 4장 마무리 부분에서는 같은 갈릴리에서 왕의 아들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우리 삶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으로 또 묵상했습니다. 오늘 다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명절은 축제의 시간입니다. 또한 예루살렘(평화의 집)은 이스라엘의 중심이면서 성전이 있는 곳으로 많은 이들이 이 명절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데, 양문 곁 베데스다(자비의 집)라는 연못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었고, 부정하다 하여 명절을 함께 지키지 못한지라 어떤 평화도 자비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다만 못가에서 오랜 소문과 전설에 한가닥 희망을 건 채 희망 고문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기다린 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연못가의 전설 때문입니다. 가끔 못의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이는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그 물이 동할지, 그리고 정말 그런 이야기가 사실인지도 불확실하지만 그렇게 치료되는 역사가 천사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믿음으로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고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소망을 두고 헛된 희망에 붙잡힌 신앙입니다. 더군다나 먼저 못에 들어가기 위해서 정작 평소에는 동병상련이었던 이들이 동족상잔의 무자비한 상황을 수도 없이 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이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존, 본질(계시, 제사, 임재)을 망각한 예루살렘 성전의 실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신앙을 상실한 무능력한 유대교의 실존, 그리고 이들을 통해 대변되는 인간 곧 하나님을 떠나 평생을 헛된 희망 고문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인류의 실존을 베데스다와 그곳에서 38년동안 병자로 살았던 이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을 삼고,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며, 부질없는 희망속에 안식도, 평안도, 생명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도 명절도 그 누구도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상태로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는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6-7절 우리가 이해한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낫고자 원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여전히 베데스다 못가의 전설을 믿으며 다만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넣어주는 사람이 없고 자신이 경쟁에 밀린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여전히 천사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로지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몸부림을 도울 수 있는 분 정도를 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과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헛된 신비와 부질없는 희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헛된 희망속에 오래도록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께서 지금 손을 내밀고, 자비와 평안과 생명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로 한정짓고 신앙하며 그런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는다고 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바르게 알고 만나고 영접하며 동행해 가고 있는지 살펴 봅니다. 


# 8-9절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요한은 이 날이 안식일임을 언급합니다. 

병자의 믿음도, 정성도, 그 무엇도 없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일방적인 자비와 치유의 선포에 대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자비하고 헛된 희망에 빠져 있는, 무한 경쟁과 생명없는 그런 무기력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축제를 회복하게 하고, 평안을 얻게 하고, 성전 곧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이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안식을 허락하신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 걸으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매어 있고, 누워 있으며, 부질없는 기대와 소망을 붙잡고 끌려가고 있는 것과 곳은 무엇이며 어디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 가족, 종교, 일이 되었든 그 무엇이라도 주님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 무엇으로도 우리 삶의 이유와 의미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며 영생을 주시는 주님이 주신 것이라야, 주님과 함께라야, 주님이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것이라야 의미도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온전한 평화와 안식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임을 다시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 10-13절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무자비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은 병나은 사람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그의 치료를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안식일을 범한 이가 누구인지 집요하게 추궁합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은 이는 정작 자신을 치료해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인간은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안식에서 이탈됩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시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안식에 초청하여 누리길 원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어느새 안식일의 참된 정신은 망각하면 전통과 의문에 속한 법으로 오히려 안식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급기야 그런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참된 안식을 되찾고 회복시켜 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병 나은 자를 추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황당한 것은 고침을 받은 이는 자신을 고쳐주신 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을 몰랐을 수도 있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고침받은 이가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에 대한 이중적 의미입니다. 

신앙의 전통 가운데는 제정된 본래의 취지를 잘 지켜 가는 것도 있지만, 그것을 망각하고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 형식적으로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사람을 옭아 매고 자유를 박탈하는 곤혹스런 의무로 자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안식일 규례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또한 고침받은 이는 자신의 38년동안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관심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표적만을 경험하고 그것을 행하신 이가 누구인지, 왜 그렇게 치료해 주셨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으려고 집요하게 추궁하자 예수님을 알게 된 후엔 너무도 쉬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행하는 모든 신앙의 요소들은 과연 원래의 취지들과 의미들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하고 있는가? 그러한 신앙의 행위들은 과연 좋은 열매로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며, 즐거이 행하고 있으며, 좋은 열매로 귀결되고 있는가? 만일 그러한 생명력을 상실하고 구태의연하며 복지부동하여 화석화되어 더이상 어떤 변화도 감동도 성숙도 열매도 없는 것들이라면 무지에서 깨어 다시금 주님의 인도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본질을 잃지 않도록...예배와 묵상과 여러 모임들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하옵소서. 


# 14-15절 죄를 범하지 않고 영생 얻을 길을 저버린 어리석은 사람

예수님은 성전에서 나음을 입은 이를 만나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을 고쳐주신 이가 누구인지 알자 바로 유대인들에게 고발한다. 

예수님께서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은 병과 죄를 연관시키기 보다 안식일과 죄를 연관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 자신을 안식일에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사슬을 끊어서 참된 안식일을 누리도록 일부러 안식일에 행하여서 안식일의 참 뜻을 이룬 사건임을 알고, 자신에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분을 알아서 이제는 회복된 관계 가운데서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가 행해야 할 합당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영생 얻을 길을 버리고 자신을 구원하신 분의 뜻을 저버린채,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의 의미를 망각하고 제 갈길로 가다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일(더 심한 것)이 없길 바라신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고발해 버립니다. 병고침은 받았지만 참된 안식을 주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 또한 순종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준 영적 해방보다 유대인들이 씌운 안식일 법의 혐의에서 더 자유롭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곡된 신앙이 낳은 결과입니다. 잘못된 신념과 전통과 신앙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참 자유와 안식을 주는 은혜의 법을 누리지 못하고 자꾸만 규례와 올무속에 가둔채 그것만 지키면 자유하리란 생각으로 가다가 결국 그 법의 울타리가 오히려 올무가 되고 갇혀버리는 경우입니다. 

날마다 주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따라 허락하신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구주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 고발이 아니라 고백과 증인으로 살아 주님 영광 드러내는 삶이길 원합니다. 


# 거둠의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헛된 희망 고문에 매인 우리의 실존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생명되시는 주님을 향한 온전한 이해와 믿음 갖게 하옵소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힘입고 세상의 거짓 신화와 안식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을 누리며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안식하지 못하게 하는 죄의 짐을 해결해 주시고

우리로 주님이 이루신 그 안식에 거할 수 있는 은혜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구주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고백하며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쉼과 평안과 안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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