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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an 27. 2022

요한복음 7:53-8:20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요한복음 7:53-8:20 

요한복음 7:53-8:20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처벌에 대해 예수님께 시험하자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당신의 메시아 되심과 새언약의 주로서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여인의 뜰에서는 초막절 절정에 등불을 밝히는 곳에서는 예수님은 세상의 생명의 빛이심을 증언하고 증거하십니다. 

*

먼저 솔로몬이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자가 자기 아들이라고 하는 소송을 지혜롭게 처리한 사건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십계명을 받아 돌아 올 때 산아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지혜의 주 되시는 예수님과 새언약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7:53-8:2 예수님은 기도의 능력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뤄가십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위협과 도전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에 다녀오신 뒤로 변함없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 여정에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뤄가는 것에 대한 여러가지 위협과 시험과 미혹이 따를 수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를 통해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셨습니다. 사역 여정에서 너무 많은 이들이 따라도 문제고, 또 많은 이들이 떠나서도 문제이지만, 어떤 이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면서 호시탐탐 문제의 빌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에 이러한 도전과 위협을 견디기 위해서 주님은 변함없이 감당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감람산은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곳으로서 주님께서 주기적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곳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 산에 오르신 이유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 위해 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서 주님은 다가오는 시험과 위협들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십자가 곧 영광의 길을 묵묵히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성전으로 돌아와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백성들을 향하여서 가르시치는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대면, 만남, 교제, 인도, 다스리심, 힘 주심, 지혜와 능력 주심등의 성령충만함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금 이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기도의 유 외에는 우리가 가야 할 이 신앙의 여정, 묵상의 여정, 광야의 여정을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주님은 광야시험에서 승리하는 법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셨고 몸소 보여주셨습니다(요한복음에서는 광야시험 대신 다른 유사 사건을 통해서 광야시험을 이기신 이야기로 나옵니다). 그러니 만일 지금 기도하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대면을 지속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는 성령의 충만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여정 그래서 패할 수밖에 없는 여정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대면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묵상과 기도의 자리 곧 주님과의 대면의 자리에 변함없이 가는 한, 우리 주님의 승리에 대한 보장이 우리에게도 주어진다는 사실에 다시금 힘을 얻으며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일을 쉬지 않겠습니다.  


# 3-6a절 신앙과 율법을 빙자해서 폭력을 범하며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성전에서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사람들 가운데 세우고서 예수님께 고발하면서 모세의 율법에 돌로치라 했는데 어떻게 하실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간음에 남자는 없고 여인만 끌고 오는것도 문제고, 그런 여인을 많은 사람들 가운데 끌어온 것도 모자라 모두가 보는 가운데 세우는 것 자체만으로도 여인에게는 치명적이며 엄청난 폭력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은 미혼이지만 정혼한 상태로 다른 남자와 간음한 것으로 보입니다(여인의 나이는 대략 14-5세초로 추정합니다). 간음에 대해서는 돌로 치라는 명령이 율법에 나와 있지만, 저자는 이 일이 고발한 조건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시험하는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처벌을 막고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되기에 이들에게는 더없이 예수님에게 치명적 결함을 안길 수 있습니다. 또 처벌하라고 할 경우 당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유대인 자체적으로 사형판결을 집행할 수 없기에 로마법에 걸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로마법을 거역하고 위배한 자로 정치법이나 내란선동자등의 죄목으로 고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판단하기 어려운 시험을 지금 예수님께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고 거룩하게 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부정한 일들을 서슴지 않는 도구로 전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대면하는 성전,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전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과 율법을 빙자해서 자신들의 권력과 탐욕을 지키고, 저항하는 이들을 억누르며, 율법을 주시고 완성하러 오신 메시아마저 이 율법을 가지고 죽이려 하는 일을,  소위 율법을 가장 알고 가르치며 살아야 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인 그래서 어처구니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서 이와 같이 종교권력과 기득권자들과 지도자의 전횡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가정과 공동체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들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성경대로 지키고 산다고 자부하면서 살아가는 뻔뻔하고 안하무인하고 교활하고 어리석은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님은 주님이 아니고 이용할 대상에 불과하며, 율법도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이용할 수단에 불과하고, 연약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소모품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선포,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도덕과 상식적인 윤리, 사람들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가 제대로 지켜진다면 오늘 이토록 교회의 비인격적, 비인간적, 비사회적이며, 비윤리적인 전횡은 그만큼 줄었을 것이다. 부디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이 넘쳐나는 교회로 회복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어둔 세상에 빛으로 소금으로 흘려 보낼 수 있기 때문이며, 지금 그 어느때보다 그런 긍휼이 소망없는 어둔 세상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6b-9절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의 새언약을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시고 그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또다시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십니다. 그러자 양심에 가책을 느낀 어른들로부터 젊은이들까지 하나둘 다 떠나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게 됩니다. 

어떤 글씨를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분분하기에 분명하게 알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퍼포먼스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십계명 돌판을 직접 새기시던 스스로 있는 분이 이제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시면서, 심비에 새길 새언약을 세우고 계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신 것도, 지금 이 여인이 간음했다고 하는데 실상 하나님 앞에서 먼저 간음한 이들은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거나 하나님 아닌 것 곧 우상을 섬기는 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미 부패하고 왜곡된 신앙을 고수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 간음의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하거나 자각하지 못하면서, 문자적 율법을 고수하면서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서 죄없으신 주님만이 심판의 자격이 있으신 거룩하신 분이심을 역설적으로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이들이 다 떠나간 것입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주님을 알면서도 섬기지 않는 것, 주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주님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일들 모두 영적 간음입니다. 지금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것, 자신의 모든 소유에 대하여 주인행세 하는 것, 주님 아닌 것을 주님처럼 섬기고 있는 것, 주님을 우상처럼 내 맘대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모두다 간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히 이러한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 주님 앞에 고백하며 내려놓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퍅하게 되어 주님의 용서를 받을 때를 놓쳐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 10-11절 예수님은 자유함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여인을 고발하며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에,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터이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인의 죄가 없다고 묵인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주님은 그 여인의 모든 죄를 알고 계십니다. 또한 그 죄가 충동적인 죄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지속해 온 죄인 것도 아십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죄에서 돌이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녀가 지은 죄의 짐은 이제 예수님께서 대신 지실 것입니다(공교롭게도 여인을 돌로 치려는 이야기로 시작된 8장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이야기로 마무리 됩니다. 이는 여인의 죄의 짐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실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케 됨을 얻었으니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우리 죽을 죽음을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는 죄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다시는 동일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열매를 기대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으면 스스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역시 내가 받은 용서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 피한 우리에게 이런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외면하면 우리는 결국 죄에 매여 살수밖에 없게 됩니다. 


# 12절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초막절의 절정에 등불을 켜는 곳(헌금함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의 빛이며, 자신을 따르는 이는 어둠(죽음)에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고, 심지어 그 빛을 거절하는 것을 넘어 꺼뜨릴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3:20). 이전에 우리는 그렇게 죽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생명의 빛을 주신 것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어둠에 거하는 인생에게 주님은 광야에서 불기둥으로 어둠을 비추고, 추위로 인한 죽음을 막아주신 것처럼, 이제 참 빛 곧 세상의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죽음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믿음과 순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와 뜻과 다스리심에 순종하면서 구주로 믿으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 생명이 있음을 믿으며 어둠가운데 거하지 아니하고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 13-15절 예수님은 진리를 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증언이 참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기에 증언이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근원과 소속 그리고 사명과 죽음까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세가지 질문은 진리를 탐구하는 모든 철학과 학문과 인생의 사유의 모든 질문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시기에 주님은 진리 자체이시며, 주님께서 스스로 증언하셔도 그 증거는 참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소개하십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 자체이시며, 진리를 전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진리를 전하는 자(전도인傳道人)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모든 것은 우리 주님으로부터 알고 깨닫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지 못하면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알지 못하면 영원히 구도자가 되어서 찾다가 결국 답을 얻지 못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진리되신 주님으로부터 정체성과 근원, 사명과 존재의 이유, 그리고 죽음과 그 이후의 모든 일에 이르기까지 답을 얻었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세밀한 주의 인도와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찐(진, 참) 그리스도입니다. 


# 16-19절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참 증인 되십니다. 

예수님의 증언이 참된 이유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두 증인이 되시니 두 증인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묻자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과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기 전부터 이미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아버지와 함께하셨고, 이땅에 오셔서도 아버지와 함께이신 참 성전이시며,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아버지의 우편에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또한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이미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증인 되시고, 아버지께서도 증인이 되시고, 성령님까지 증인이 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온전한 증인의 증언으로 참이되십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하고 위협하며 심지어 죽이려고 모의까지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데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멈출 수 없는 극단으로 계속 치닫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주님의 참된 증언을 들으며,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면서 함께 하신 예수님. 우리가 그런 주 예수님을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도 알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 20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때를 따라 일하십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헌금함 앞 곧 여인의 뜰, 등불을 켜는 곳에서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잡으려고 했던 이들이 분명 있는데도 아무도 잡는 이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요한은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의 가르침, 그리고 제사가 있어야 하는 곳이 성전인데 지금 그곳에서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믿음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선포에 대해서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이려던 자들은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주관하시고 예비하신 그 때를 인내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 거둠의 기도

새언약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

변함없이 기도의 능력을 통해 주님을 따르길 원하오며

이성적 지각과 상식적인 윤리와 신앙의 기본을 지켜가고

새언약의 원리인 용서와 사랑을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적 간음의 죄에서 돌이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자유케 하신 주님의 은혜를 따라 용서와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빛되신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어둠 가운데 있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되신 주님을 통해 정체성과 근원 그리고 사명과 존재의 이유를 알고 살며

죽음까지도 두려워 하지 않는 생명 주심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참된 증언고 증거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날마다 주님을 알아가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며

빛의 자녀로 우리도 빛되신 주님의 증인으로 부족함 없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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