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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코란도, 뷰티풀 강화도

뷰:티풀 코란도와 함께하는 강화도 여행!

강화도 광성보  


두 번째 일정은 강화도 루지에서 차로 25분 거리, 1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광성보입니다. 이곳은 강화도에 위치한 12진보(鎭堡) 중 하나로 애초에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토성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광해군 때 무너진 성이 보수됐고 그 후 1658년(효종 9년)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합니다. 이어서 숙종 때인 1679년에 기존 토성이 석성(石城)으로 증축됩니다.

이곳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인데요. 당시 미국은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하던 중이었고 극동함대 전함을 강화해협으로 보내 무력시위까지 합니다. 이에 조선군은 초지진·덕진진·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합니다. 애초에 미국은 일본을 개방시킬 때처럼 무력시위와 함포사격으로 충분할 것이라 판단했지만 저항이 예상보다 크자 기어이 해병대 병력을 전개합니다.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했고 이어 24일, 덕진진을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광성보로 진격합니다. 당시 양측이 보유한 개인화기만 비교해도 이 전투의 결말은 뻔했는데요. 조선군은 사거리가 100미터도 안되는 단발 화승총을 사용한 반면 미군은 총알이 5배 더 멀리 날아가는 볼트 액션 방식 연발 소총으로 무장됐습니다.

게다가 미군은 다수의 전투 경험이 있는 직업군인들로 구성됐지만 조선군 다수는 평소에 생업에 종사하다가 순번에 따라 차출된 사실상 민간인들입니다. 이 상황은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통해서도 일부 알 수 있는데요. 이 전투에서 조선 수비군 350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당한 채 포로로 잡히는데요. 이들은 치료 후 조선에 인계됩니다. 반면 미 해병대는 장교 1인과 2명의 병사가 전사합니다.

당시 전투와 이후 개항 등을 거치면서 광성보는 파괴됐고 현재의 문루와 포진지인 돈대(墩臺) 등은 1976년에 복원된 것입니다.

광성보는 문루 1개, 4개의 돈대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중 용두돈대는 해안에서 강화해협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손돌목에서 바닷물이 빠져나가며 일으키는 소용돌이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이 지명은 고려 고종 때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임 당했다는 뱃사공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만 역사적 사실인지는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그 옆 해안에는 3개의 포대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광성돈대입니다.

이것은 흙을 쌓아 둔덕을 만들고 그 밑에 포대를 설치한 형태로 적의 상륙에 대비한 시설입니다. 조선 광해군 때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개항 이후 외국의 눈치를 보던 대한제국 스스로 파괴하는데요. 최근에야 복원됩니다. 이두 포대의 경우 바다 건너 덕포진과의 거리가 600미터 남짓으로 당시 조선군이 사용하던 대포의 사거리가 700미터이고 소포가 300미터였던 점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촘촘한 방어망인 셈입니다.

그 위쪽 100미터 지점에 위치한 손돌목돈대는 강화해협과 그넘어 김포지역까지 감시 가능한 위치에 설치된 포진지입니다.

신미양요 때 미해병대는 초지진으로 상륙한 후 2일 만에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광성진에 들이닥칩니다. 마지막 전투는 손돌목돈대안에서 일어나는데요. 이날 백병전은 무척 치열해 대부분의 전사자가 이곳에서 발생됩니다.

참고로 광성진은 연중무휴로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개장되고 입장은 폐장 한 시간 전까지 가능합니다. 입장료는 성인이 1100원이고 어린이는 700원입니다. 또 만 65세 이상과 강화군민은 무료입장입니다. 주차공간은 최대 75대이고 주차비는 무료입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다음 장소는 광성보에서 차로 20분, 13킬로미터 떨어진 강화 읍내의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입니다. 이곳을 차를 타고 가려면 먼저 주차관련 정보를 챙겨야 합니다.

성당 바로 앞은 일방통행인 데다가 주차장은 좁아 최대 7대까지입니다. 그것도 늘 차있습니다. 바로 옆에 고려궁지 주차장이 위치해있는데요. 이곳은 관광버스를 위한 시설입니다. 주민 편의를 위해 한쪽에 총 40대 가량의 소형차 주차 구획이 마련돼있는데요.

주차장 입구의 안내에도 쓰여있듯이 장기주차 또는 방치가 많아 방문객이 이용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한편 인근 강화읍 사무소 앞에는 관청리 공용주차장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총 72대 주차가 가능하며 주차비는 무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외의 에피소드가 벌어집니다. 이날 마침 강화성당 바로 옆, 용흥공원에서 강화 읍내 고등학생들 주최의 체험행사가 진행 중입니다. 아이가 이런 걸 워낙 좋아하다 보니 성공회 강화성당 관람을 포기하고 만들기 체험을 하겠다고 합니다. 결국 나중에 나 역시도 몇 가지를 아이와 함께하는데요. 하지만 우선은 언덕 위 성당으로 향합니다.

강화성당은 1896년 한국인이 최초로 세례 받은 것을 기념해 당시 대한성공회 주교 존 코르피(한국명 고요한)와 조 마가 신부의 기획으로 설계됩니다.


이어서 1899년 11월부터 일 년간의 공사를 거쳐 1900년 11월 15일에 완공되고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으로 봉헌됩니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0칸짜리 2층 목골조 벽돌집으로 전체 형태는 로만 가톨릭에서 애용하던 바실리카 양식이지만 얼핏 보기에는 한옥처럼 보입니다. 물론 세부적인 요소는 한옥에서 따왔고 당시에 궁궐 건축에 참여했던 이가 현장에서 공사를 감독했다고 전해집니다.

건축물 양식뿐 아니라 정원에 심어진 나무에서도 당시 성공회가 다원주의에 입각해 포용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바로 보리수나무와 회화나무입니다. 전자는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해탈했다고 전해지면서 불교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또 후자는 유교와 관련 있습니다. 하지만 회화나무는 지난 2000년 태풍 볼라벤으로 인해 쓰러져 지금은 보리수나무만 남아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상식, 성공회 즉 영국국교회는 가톨릭의 한 지파가 아닙니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첫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그녀의 동생 앤 볼린과 재혼하고 싶어 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로마 교황청과 갈등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로만 가톨릭과 분리된 교회를 직접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영국 국교회이고 이것을 국내에서는 성공회로 부릅니다. 물론 성공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로만 가톨릭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가톨릭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로 분류됩니다.

이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신부가 결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편 영국국교회 분리 과정은 소설 ‘천일의 앤 불린’에 자세히 소개되는데요 이것은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런 배경과 가톨릭과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천주교 성당 중 하나로 이해하고 돌아갑니다.    


강화도 용흥궁과 젓국갈비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아래에는 용흥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 25대 왕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강화도령’으로 살던 외갓집으로 애초에 초가이던 것을 1853년 당시 강화 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다시 짓고 이후 왕의 잠저*는 용흥궁으로 불리게 됩니다.
*잠저: 왕이 되기 전 살던 집

현재의 형태는 1974년 보수 작업에 의한 것으로 잠저구기비각 1동,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잠저의 총면적은 1554 평방미터, 470평 규모입니다. 크기는 작지만 왕이 살았던 집인 만큼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가 적용되어 건축양식만큼은 한양의 유명 사대부집 못지않습니다.

용흥궁은 용흥공원에서 강화성당 출구를 가로질러 난 골목길을 따라 30미터쯤 아래 또 강화경찰서 왼쪽 담길을 따라 70미터가량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위치해있습니다.

이어서 강화경찰서 왼쪽 담길을 따라 용흥궁을 지나 50미터 정도, 관청리 공용주차장 방향으로 더 가면 왼쪽에 일억조식당이 위치에 있습니다. 이곳은 강화도 음식 중에 하나인 젓국갈비로 유명한 곳이고 예능 프로그램인 ‘알쓸신잡’ 강화도 편의 촬영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족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점심시간 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흔적들을 직원들이 정리 중입니다. 

그 바람을 살짝 피한 덕분에 우리 가족은 느긋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한편 출입구의 꽃문양 비닐 커튼과 가운데 식탁 자리를 중심으로 한쪽에 방이 배치된 것을 보니 이곳은 예전에 골목 쪽에 점방이 배치된 가정집이었던 모양입니다.

젓국갈비는 갈비뼈와 살을 LA 즉 횡축으로 절단한 돼지갈비를 멸치육수에 담근 후 갖은 채소와 함께 끓이다가 마지막에 새우젓으로 맛을 낸 음식입니다. 따라서 갈빗살은 담백하지만 국물에는 새우젓 향과 맛이 배어납니다. 이때 새우젓은 교동도산이 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 데다가 점심밥을 먹고 나니 살짝 피곤한 것이 딱 카페인이 필요한 조건입니다. 아니 굳이 커피가 아니어도 어딘가 시원한 자리에 앉아 쉬고 싶습니다. 하지만 강화도까지 온 마당에 흔한 브랜드 커피집에 자리 잡기도 뭐 해서 다시 차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요. 조금 더 경치 좋은 곳을 찾다가 기어이 외포리를 지나고 석모 대교까지 넘었습니다.    


다리로 연결된 석모도와 교동도  


석모도는 결혼 전 내가 일 년이면 열 번 가까이 자주 찾던 곳입니다. 하지만 이번이 거의 7년 만이니 많이 변했습니다. 물론 석모대교가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이 다리는 지난해 6월 28일 개통됐는데요. 길이는 1.41킬로미터에 폭 11 미터짜리 왕복 2차선 교량입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양 끝단의 로터리를 오가는데 2분이면 충분하니 예전에 카페리를 이용할 때 40분이 소요됐던 것에 비하면 천지차이입니다.  


석모도 하면 보통 보문사를 떠올리는데요. 반면 나는 섬 북쪽의 넓은 논을 좋아합니다. 상리 • 중리 • 하리로 이어지는 논 사이를 오가며 계절별로 달라지는 이곳의 풍경을 필름에 담기도 했습니다. 또 오래전 하리 갯벌 위에 영화 ‘시월애’ 세트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당시 타고 다니던 뉴코란도 602EL로 갯벌 사이를 달리기도 했답니다.

이맘때 논에는 물이 가득합니다. 막 모내기를 끝내서 그런데요. 그 안에 푸른 하늘이 담겨있고 그 위로 연두색 깃털 같은 어린 모종들이 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들여다 보면서 노스탤지어**를 노래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내 디자인과 사진에 담긴 영감 같은 것이도 합니다. 


**노스탤지어: 향수병 또는 향수라고 해석되는데 애초에 17세기 오스트리아 의학자 요하네스 호퍼가 산악지대에 근무하던 스위스 용병들의 신경증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조합해 만든 개념.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는 병리적 정의는 사라지고 알 수 없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목마름이란 의미의 시적인 표현으로 흔히 사용됨

강화도와 석모도 역시 요즘 국내여행의 주요 테마인 카페 투어의 영향을 받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강화소창을 만들던 조양방직 공장 자리의 카페입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 중 하나인 루인 카페(Ruin-cafe) 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허물어진 건물을 최소한으로 수리한 후 카페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폐허와 최신 유행 또 삶과 죽음의 공존으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사람이 덜 붐비면서 풍경이 멋진 곳을 찾아 석모도 보문사와 하리를 연결하는 상봉산 언덕길에 들어섭니다. 이어서 그 중간에 위치한 한가라지 카페를 찾습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한가라지 리조트와 농원의 입구로 사용됐고 지금은 노란색 벽이 인상적인 갤러리 카페가 들어서 있습니다. 이곳은 또한 지는 해를 바라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한데요. 우리 가족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로 가기 위해 아직 해가 높을 때 자리를 뜹니다.    


민통선內 교동도  


교동도는 섬의 서북단이 황해도 연백과 지척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양쪽 해안 간의 최단거리는 2.5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일부 지역의 경우 군사분계선과의 거리가 800미터도 채 안 됩니다. 내륙의 경우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 비무장지대가 4킬로미터이고 거기에 남측의 경우 다시 5에서 20킬로미터를 민간인통제구역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동도 전체가 민통선 안에 있는 셈입니다. 참고로 섬의 남쪽 남포리 선착장에서 북쪽 인산리 은행나무까지의 직선거리는 6 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입도시 교동도 관할부대장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동대교(총 연장 3.2킬로미터, 왕복 2차선) 3킬로미터 전 이강교차로 검문소에서 초병에게 신분증을 제시합니다. 이때 입도 신청서를 받게 되는데요. 이어 20 미터가량 전진 후 차를 도로 우측에 세웁니다. 여기서 앞서 받은 신청서를 작성해 초병에게 주면 방문증과 바꿔줍니다. 이것은 운전석 앞 대시보드 위에 항상 놓아야 하고 교동도에서 나올 때 같은 곳 반대편 초소에 반납합니다.

간혹 초병이 방문지를 물어보는 경우가 있는데요. 말 그대로 그냥 방문하는 경우에는 ‘교동 제비집’이라고 하면 됩니다. 이는 맛집 이름 같지만 실제로는 교동도 관광안내센터이자 섬 내 유일한 카페이며 갤러리입니다.

이곳 1층에는 ‘평화의 다리’ 영상과 ‘교동신문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 자전거 대여소 등이 운영 중입니다. 또 2층에는 카페와 갤러리가 마련돼있습니다. 카페에서는 교동도에서 생산된 쌀과 기념 머그도 구입할 수 있습니다.

한편 교동 제비집 앞에는 80대 수용 가능한 무료 주차장이 위치해 있습니다. 하지만 휴일에는 늘 자리가 부족합니다.

참고로 교동 제비집은 오전 10시에 열어 오후 6시에 닫습니다. 자전거 대여와 반납도 이 시간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자전거 대여는 2시간 기준으로 1인용 4000원, 2인용 8000원이고 추가 1시간당 각각 1천 원과 2천 원이 추가됩니다.

교동도에서 볼거리라고 하면 교동 읍성터, 연산군 유배지와 해안철책선 안쪽에 조성된 자전거길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짧은 시간 머물다 갈 나그네들에게는 다소 부담될 수도 있는데요. 이 경우 교동 제비집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위치한 대룡시장 방문을 추천합니다. 이곳은 반경이 200미터 남짓 되는 작은 규모인데요. 내부에는 60에서 70년대 분위기로 꾸며진 가게들이 각자 향수 어린 물건과 음식을 팝니다.

이발소 벽에는 전직 대통령들의 선거 포스터가 붙어있는데요. 이들 대부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중에는 천수를 누리지 못한 분도 있고 여전히 살아 사람들에게 욕먹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무상에 격세지감이 따로 없습니다. 반면 빙수집 벽에서 반가운 영화 포스터를 발견했는데요. ‘독수리 오형제’와 똘이장군 극장판 ‘붉은돼지’입니다. 이중 후자는 영화 초반 교동도가 등장해 더욱 의미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로는 꽈배기를 들 수 있는데요. 제비 모양을 한 단팥빵과 안에 잡채와 치즈 등이 들어간 풀빵 모양의 호떡도 나름 잘 팔리는 간식거리입니다.

오후 5시, 하늘색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고 우리 일행은 교동 제비집 앞을 출발해 귀갓길에 오릅니다. 교동도로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요. 교동 대교 양측 진입로가 넓은 것이 차후에 왕복 4차선 확장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도로가 연백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서울에서 해주를 갈 때는 강화도와 교동도를 통하는 것이 자유로 쪽 보다 더 가깝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약 두 시간이 소요되는데요. 이동 중 자동차 전용도로와 고속도로에서는 타고 간 2019 코란도에 탑재된 IACC와 차선유지 보조 등의 반자율 기능을 십분 활용해 피로도를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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