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 식탁 위에 고기가 오르기 위한 과정
여름이다. 오늘도 날은 뜨겁고, 높아지는 습도에 불쾌지수만 높아간다. 벌레와의 전쟁도 시작되었다. 캠퍼스의 로망 중 하나가 여름날 잔디밭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지만, 실제로는 달려드는 날벌레들을 피하기 바쁘다. 잔디는 이미 개미들이 점령했고, 하늘은 날벌레가 차지했다. 그나마 아직은 모기가 기승을 부리지 않으니, 최소한 실내 공간의 거주권은 오롯이 인간에게 있다.
어렸을 때는 과학자가 되면 커다란 돋보기와 현미경을 들고 잔디밭을 활보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망원경 앞에서 밤을 샌다던지. 최소한 <실험 관찰> 책은 그렇게 말했다. 과학자 흉내를 낸답시고 개미를 많이도 괴롭혔다. 개미들이 이동할 때 길을 막는다던가, 열심히 지어놓은 개미굴 구멍을 돌멩이로 틀어막는다던가 말이다. 아직 충분히 과학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개미를 좋아한다. 그 때문이라도 개미를 만나면 괜한 동질감을 느끼기 일쑤다. 수업 시간에 늦어 부랴부랴 뛰어가는 중에도 혹시나 개미 한 마리를 실수로 밟을까 발을 살피게 된다. 죽은 개미를 발견하거나, 동료의 사체 곁에서 우왕좌왕하는 개미2를 만나면 괜히 미안해지기도 한다.
딱히 개미가 특별한 곤충이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방에서 벌레를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저걸 어떻게 죽이지 않고 내쫓지'다. 이유는 두 가지다. 살생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고, 그 시체를 치워야 한다는 건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다. 또한 살생에 대한 혐오감은 대상의 크기에 비례해서 커진다. 모기 한 마리를 죽였을 때와, 기르던 사슴벌레의 다리를 실수로 부러뜨렸을 때의 차이라고 하면 이해가 쉽겠다.
본능이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나름의 학습의 결과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생명은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배운다. (인간이 아닌)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몰상식하고 잔인하다 손가락질당한다. '생명의 소중함'은 인간 사회에서의 불문율이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법칙이 말하듯, 먹고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죽여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일같이 식탁에 오르는 고기를 먹을 때마다 그 동물의 살아있을 때를 생각하는 것은 조금은 비위가 상한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인간은 둘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인과관계를 거부하려 애썼다. 옛 사람들은 살육의 책임을 도살자에게 떠넘겼다. 많은 중세 국가에서 도살자를 뜻하는 단어는 하층민의 직업이자 신분을 나타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는 '백정'이 그 역할을 맡았다.
고려 시대의 백정(白丁)은 일반 백성을 나타내는 단어였다. 당시의 백정은 하얀 옷을 입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자영농에 가깝다. 백정의 의미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때다. 우리가 생각하는 백정은 '화척'에 가깝다. 화척은 거란족, 말갈족 등 외국에서 건너온 이들로 구성되었으며, 사회에 섞여들지 못한 이들이 배척받는 직업인 도살을 다루게 되었다.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백정은 일반 양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직업군이었지만, 조선시대 중기 이후 과도한 조세로 양민들이 백정으로 직업을 변경하며, 사회 하층민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격차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두드러져, '백정각시놀음'이라는 문화까지 형성되기도 했다.
서양의 경우도 도살업자들은 일반 양민과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신분의 차이 외에도, 영어권 국가에서는 언어적인 관점에서 동물과 그 고기 사이에 차이를 두었다. 한국어는 '고기'라는 단어에 접두, 접미어를 붙인 단어로 각 생물에서 나오는 단백질을 표현한다. 닭은 닭고기로, 돼지는 돼지고기로, 소는 소고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어권 국가에서는 동물과 그 고기를 나타내는 단어에 차이가 있다. 돼지(Pig)에서 나오는 고기는 pork로, 소(cow)에서 나온 고기는 beef, 양(lamb)고기는 mutton 등이다. 이처럼 단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동물성 고기를 먹을 때 도살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고기와 동물간의 괴리는 현대에 와서 더욱 가속되었다. 동물이 인간 곁에서 자랄 때에는 동물이 죽어야 고기가 생긴다는 사실이 자명했다. 암탉이 낳은 달걀로 계란 후라이를 하고, 소의 젖을 짜서 우유를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기계적인 축산업이 발달하면서 인간과 동물간의 간격은 점차 멀어졌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더이상 소고기를 먹을 때 소를 떠올리지 않고, 달걀 후라이를 하며 씨암탉을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의 편의를 위해 수많은 동물의 죽음은 잊혀져 갔다.
대부분의 공장식 축산은 가축을 방목해 기르는 전통적인 축산 방식과 달리, 효율성을 우선시해 가축을 좁은 시설에 가둬 기른다. 이렇게 공장식으로 길러지는 가축은 좁은 우리에 갇혀 살며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고, 생장 촉진과 질병 예방을 위한 다량의 항생제를 투여받는다. 또한, 가축 전염병 위험이 확산하면 도살 처분당하기도 한다. 오늘날 매해 도살되는 식용 동물의 수는 세계적으로 약 600억 마리에 이른다.
도살과 동물복지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이제 많은 국가에서 도살법에 따라 가축을 도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축을 실신시키고 방혈하는 과정을 합쳐서 도살이라고 정의한다. 소의 경우는 압착공기 혹은 탄약으로 앞이마를 천공시고, 돼지나 닭에게는 고전압전류 쇼크를 사용한다. 돼지의 경우 이산화탄소로 마취시키기 위해 가스실에서 작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모두 더 빠른 시간 안에 최소한의 고통으로 도살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아무도 죽지 않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먹이사슬로 인한 가축의 죽음을 존중하고, 그들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