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고 Apr 23. 2017

라따뚜이

소고 수필선

기억


처음 먹는 음식에 대한 기억을 인간관계에 빗대어 그린 만화가 있다. 한 친구가 "이거 네 이야기 같아."하면서 추천해주었다. 사실 먹는 것에 큰 의의를 두지 않는 나라서, 처음에는 '이런 소재로 그림을 그려?' 하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끼니는 대충 때우는 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삼각김밥, 컵라면, 밥버거, 햄버거 혹은 과일 통째로. 친구들과 무엇을 함께 먹지 않는 한, 나 혼자 하는 식사는 언제나 단출하다. 그런데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내게도 첫 음식에 대한 기억들이 제법 있더라. 앉은자리에서 리스트를 만들고 추억놀이를 시작했다.





에스프레소


지금은 없어졌지만, 학교 앞 이디야 커피가 있던 자리는 원래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누가 보아도 '아재' 같은 분이 하던 노-브랜드 커피숍이 있었다. 그곳에는 엘피 음반을 빼곡히 담은 나무 상자가 의자로 사용되고 있었고, 언제나 장르 불명의 믹스드 재즈가 흘러나왔다. 대학생이 되고 한창 친구가 없던 나는 그곳에 발을 들였다. 그때는 참 촌스러워서, 츄리닝 바지에, 아무런 운동화, 과잠을 걸치고 백팩을 메었다. 그때는 그곳이 허름하고, 구리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아보니 나는 그곳에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왕따 시키는 촌티 나는 갓 대학생과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보헤미안 바리스타의 조합은 누가 보아도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 했을 것이다.


"오늘도 아메리카노로 드릴까요?" 보헤미안 아저씨가 물었다. 나는 늘 아메리카노만 마셨기에, 에스프레소라는 메뉴가 늘 궁금했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사촌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티를 내선 안됐다. 나는 마치 늘 마셔왔다는 듯,


"에스프레소 한 잔이요."했다.



잠시 후. 손가락 두 개가 간신히 들어갈법한 작은 잔에 눈물만한 커피가 나왔다. 나는 처음엔 그게 무슨 식전 소스인 줄 알고, 본 음식이 나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나 음악이 두 곡이 다 끝날 때까지 메인 요리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이게 에스프레소구나 했다. 그리곤 단박에 호로록 삼켰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알싸한 맛에 콩기름 냄새가 콧속을 헤집었다.


"마시는 법을 아시네요." 바리스타 아저씨가 말했다.

"하하, 그런 거 몰라요. 그런데 참 향이 좋네요." 처음 마시는 게 아닌 척. 내가 말했다. 이제와 말하지만 겁나 써서 물을 한 잔 마시고 싶었고, 그때의 쓴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해, 지금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중이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생전 처음 느끼는 고-카페인에 심장을 부여잡다 밤을 꼴딱 새웠다.




알리오올리오 파스타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먹게 된 건 소개팅 자리에서였다. 그녀는 대학생이었고, 참 크고 예쁜 눈, 그리고 쾌활하고 정중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처음 마신 지 2년이나 지난 상태였는데, 패션 센스는 여전히 구렸고, 태도는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학교가 늦게 끝나서, 근처에 있는 파스타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메뉴판을 받은 우리는 메뉴 하나씩을 고르기로 했다. 그녀는 리코타 치즈 샐러드를 골랐고, 나는 파스타 섹션을 열심히 보다가 알리오올리오를 골랐다.



그때까지 나는 파스타는 토마토랑 크림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 파스타가 기름에 볶아 나왔다. 처음 보는 비주얼에 신기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티를 낼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좋았고, 흠 없어 보이는 것이 곧 잘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평생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만 먹어온 사람인 척 연기하며 그것을 먹었다.


기름에 부드럽게 볶아진 면이 나의 포크 끝에 동그랗게 감겨, 미끈하게 베어 나왔다. 숟가락과 함께 입으로 가져간 파스타는 고소한 기름과 함께 환상적인 맛을 냈다. 그때 그녀와 내가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딱 두 가지만 기억에 남았다.


하나는 길동(지금은 둔촌동)이고, 다른 하나는 "이 집 파스타 잘 하네"다.

그 날 이후로 집에서 파스타를 해 먹을 때면 나는 팬에 기름부터 두른다.


그녀는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지고 있었다.





생선 매운탕


산적처럼 생긴 외모와 달리, 나는 생선탕을 잘 먹지 못했다. 내 스물셋 생일날. 친하게 지내던 형 둘이 나를 불렀다. 형들은 나와 열 살이 넘게 차이가 났다. 형님(?)들은 생일을 혼자 보내는 내가 딱했는지 나를 납치해서는 이곳저곳 맛있는 걸 사 먹였다.



점심은 삼청동 현대미술관 바로 옆에 있는 돈가스집을. 저녁은 삼각지 역에서 생선 매운탕을 먹었다. 형들이 먼저 매운탕을 먹자고 했다. 나는 형들 앞에서 차마 못 먹는 음식이라 할 수 없어서, 형들이 먹는 모양새를 따라 그것을 모방했다. 형들은 생선 몸통 한 덩이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했다. 이윽고 뼈만 툭. 뱉었다. 나는 또 생선만 20년 먹은 사람인 척 그것을 따라 했다. 형들은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었던 것 같다.


매운탕 국물 연기, 그 끝에 남은 비린 향. 나는 그것을 싫어했다. 집에서 매운탕을 끓이면 그것은 늘 아빠 몫이 반, 엄마 몫이 반이었다. 나는 언제나 콩나물국, 혹은 다른 어떤 국과 함께 밥을 먹었다. 타협할 수 있는 범주는 국물까지였다. 그래도 매운탕은 국물에 베인 그 칼칼한 끝 맛이 기억에 남아서, 건더기만 살살 남기고 어찌어찌 가끔 비울 수 있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형들이 준 생선 대가리를 입 안에 넣고, 그것을 우물거리고 있다.


아직도 그때 매운탕을 어떻게 먹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시 생각하니 코가 비릿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래서 이렇게 잊지 못하나 보다. 그날 처음 맛본 생선 살의 질감, 그리고 형들의 따뜻함을 나는 꾸역꾸역 더웁게 삼켰다.





라따뚜이


사실 라따뚜이가 처음부터 생각난 건 아니었다. 이 얇게 저민 프랑스 요리가 생각난 이유는 오늘 점심으로 먹은 일본 가정식 때문이다. 소개팅을 했다. 태어나서 세 번째다. 그 사람은 내게 "일식 좋아하시나 봐요"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사실 정신이 없어서 예스라고 했다. 그때 나는 뜬금없이 도쿄 바나나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아닌 척했지만.


소개의 시간은 어찌어찌 끝났다. 그녀와 나는 이제 다시 모르는 사람이 되어 세상 속으로 흡수되어 돌아갔다. 일식을 좋아하냐는 질문은 집에 돌아가는 길. 다시 한번 너의 질문으로 치환됐다.


"라따뚜이 먹어본 적 있어요?" 너는 내게 물었다.

"아니, 너는?"

"저도요." 너는 말했다.

"그럼 언젠가 레스토랑 찾아 놓을게, 같이 가자." 내가 말했다.


너는 가끔 내게 말했다. "오빠는 결혼할 수 있어요.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네게 그 사람이 너였으면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머잖아 헤어졌다. 나는 결혼하고 싶다. 아마도 너랑은 정말로 어렵겠지. 그렇다고 너와의 기억을 없는 체하며 그 기억마저 사랑하지 않게 될까? 그때의 우리는 사랑이 아니었다는 듯이?



당시 너는 내게 결혼할 수 있을 것 같냐고 자주 물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네게 0.0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했었다. 이제 누군가 내게 "결혼할 거예요?"하고 물으면, 나는 그냥 "하고 싶다"고만 한다. 그러다 분위기라도 어색해지면, 그 무거운 공기 위에 "에이, 안되면 혼자 하지 뭐."하고 되도 않는 농담을 얹는다.


짧았던 우리의 관계가 끝나고, 나는 울었다. 아마 너도 울었을 것이다.


한참 뒤에 혼자 간 레스토랑 메뉴에 라따뚜이가 있었다. 그것을 하나 시켰다. 귀여운 생쥐 셰프가 나오는 동 애니메이션 제목처럼, 그것은 가지, 토마토, 피망이 잔뜩이지 않았다. 접시에 예쁘게 한 줌 있는 그것을 포크 사이로 살살 떼어 하나씩 입에 넣었다. 네가 생각났다. 그냥 이렇게 라따뚜이를 음미하다 눈을 뜨면, SF 판타지처럼 네가 눈 앞에 앉아있어서, 너와 이것을 나누어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를 만나면서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참 많이 입에 달고 살았다. 이제 너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스치는 바람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는 대신, 너를 보며 싱긋 웃을 것이다. 그런데 미소가 지난 자리에 너는 없다. 나는 그렇게 첫 라따뚜이를 천천히 비웠다.





여전히 서툴다


음식을 처음으로 접하는 경험. 그것은 언제나 서툴다. 이제 나는 처음 먹는 음식은 "처음 먹는다"라고 솔직하게 밝힌다. 그러면 그것을 같이 먹는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내게 그것을 대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상세한 설명에도 처음은 여전히 서툴다. 무엇을 어디에 찍고, 무엇과 함께 포크를 관통시켜 입으로 가져가야 할지, 그 맛은 몇 초 동안이나 음미해야 할지, 어떤 조합이 되어 입과 콧속을 헤집게 될지, 나는 영영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지한 자는 아이처럼 접시 앞에 앉는다.


처음 먹는 음식은 늘 조금씩 흘렸던 것 같다. 어떤 음식은 평양냉면처럼 제대로 그 맛을 알기까지 도전을 반복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오지 않을 경험. 그리고 단 한 번의 기억으로 남을 시간이다. 나는 그런 처음을 수도 없이 무념으로 보냈다. 그리고 이제야 느지막이 생각한다. 아, 더 행복한 경험으로 남겼으면 좋았을걸. 같이 먹는 사람들에게 진즉 처음을 이야기할 걸. 하고.



"저 말이죠. 사실은 이 음식을 처음 먹어봐요. 그래서 아마도 잊지 못할 거예요. 어쩌면, 다음번 수필에 여러분의 이름이 등장할지도 몰라요. 참 고마워요. 뭐가 고맙냐고요? 저랑 처음으로 이 음식을 같이 먹어주어서요." 같은 대사를 치는 거다.


그러나 이제 그런 처음이 내게 얼마나 남아 있을까?


나는 한참을 멍하니 생각하다가 익숙한 자세와 능숙한 행동으로 포크를 잡고, 남들과 같은 자세로 올바른 식사를 마쳤다. 사실, 올바른 게 있기나 할까? 익어버린 자세 말고 말이지.


Fin.



Special Thanks to: 1616seiing

매거진의 이전글 입맞춤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