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기현이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치매가 온 지 꽤 오래되었을 거란다. 손목에 자해 흔적도 있는 걸로 봐선 심한 우울증도 앓았을 것이라 했다. 미란은 상담을 마치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이혼한 지 8년이나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기현을 걱정했다. 미란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쪼그려 앉아 깊고 낮은 소리를 냈다. 그녀는 울다 지쳐 병원 의자에 걸터앉았다.
미란은 아들 휘준을 떠올렸다. 휘준은 10년 전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 있었다. 백휘준 일병은 부대 내 PX에서 호흡 곤란으로 쓰러졌다. 그의 최초 사인은 ‘기도 폐쇄에 따른 질식사’였다. 당시 군은 냉동만두가 원인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사실 선임병 네 명에게 정수리와 가슴 등을 수십 차례 구타당하고 쓰러져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병원에서 사망한 사건이었다. 기현과 군인권센터가 집요하게 파고들어 사건을 조사하자 사인은 ‘장기간 지속적인 폭행에 따른 과다출혈과 그로 인한 속발성 쇼크 및 좌멸증후군’이라는 길고도 어려운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결국 정밀 조사가 시작되었다. 백휘준 일병은 무려 4개월 동안 군부대에 갇혀 폭행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밤에 잠을 안 재우고 기마자세로 서 있게 하고, 내뱉은 가래침을 혀로 핥게 하기도 했다. 누운 채로 물 1.5리터와 치약 한 통을 강제로 먹였다. 조폭을 동원해 밖에 있는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를 괴롭혔던 선임병들은 모두 구속되었다. 네 명 가운데 괴롭힘을 주도했던 병장은 징역 30년을, 이에 가담한 상병 두 명은 징역 15년, 일병 한 명은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하나뿐인 아들 휘준을 잃은 기현과 미란은 2년을 공허하게 보냈다.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자꾸 휘준과의 기억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부부의 집은 아들을 잃어버린 상처를 잔뜩 머금은 채 그늘지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벽에 생겨난 곰팡이가 화선지 위에 먹처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나갔다. 미란은 그 집에서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으로 가시가 딸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결국 휘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혼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그런 기현 앞에 온몸이 멍든 연우가 나타났다.
연우를 그 지옥 같은 집으로 돌려보낸 날, 기현은 이혼하고 처음으로 미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먹을 걸 잔뜩 사 들고 갔다. 떡볶이, 순대, 만두, 치킨, 피자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들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미란에게 말했다.
“배가 너무 고프다. 같이 먹을래?”
“아니, 난 괜찮아.”
“좀 먹어. 당신 너무 말랐잖아. 얼른.”
미란은 기현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만두 하나를 간장에 찍어 입에 넣는 사이 기현은 이미 피자 두 조각과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음식을 먹는 기현의 모습은 정말 낯설었다. 기름진 입술 사이로 힘겨운 숨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어 넣었다. 미란은 냉장고에 있는 매실액을 꺼내 물에 타서 내밀었다.
“체하겠다. 여보. 천천히 좀 먹어.”
“당신도 얼른 먹어. 내가 다 먹겠다.”
미란은 순대 하나를 집어 입에 넣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일은 무슨. 그냥 배가 고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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