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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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만원짜리 책?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과연 정말로 이 책이 15만원의 가치가 있을까? 15만원이면 충분히 아껴서 한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돈이었다. 심지어 나는 이 사람의 마술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 저자 본인조차 '말도 안 되는 마법이 실린 책이 아니다.' 라고 공언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만족할 책'이라고도 말했다. PH라는 사람의 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15만원이 그만한 값어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과연 나도 그럴까?
고민하다가 예약구매 링크를 클릭했다. 그곳에는 단순한 배송정보 외에도 여러가지 이상한 질문들이 담겨있었다. 마치 용사의 검이, 자신을 다룰 수 있는 적합한 용사를 찾기 위해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애송이 따위에게 읽힐 수는 없지" 라는 느낌으로, 이 정도 질문에도 답할 수 없는 사람이 감히 이 책을 구매해서 그 가치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겠냐고 묻는 것 같았다.
호그와트 입학지원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물론 저자 본인이 말한 바에 의하면, 이 질문은 '자격 시험'이 아니라 '성향 테스트'에 가깝다고 했다. 저자는 독자가 기대하는 방향과 책의 방향성이 다를 것을 두려워했다. 독자가 실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전에 미리 환불해주기 위한 장치라고 말했다. 나는 PH가 소비자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라이브 방송에서 PH가 직접 밝히기를, 환불 제의를 드렸지만 그럼에도 구매를 원하는 분들이 가장 두렵다고 말한 바 있었다.
많은 창작자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두려움을 느낀다. 모든 구매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이 세상에는 구매자의 100%가 만족하는 제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의 영원한 베스트셀러인 성경조차 오늘날 안티 팬이 엄청 많다는 걸 기억해야한다.
환불 제의 문자는 내게도 왔다. 저자는 내 답변의 어떤 부분으로 인해 내가 이 책과 맞지 않을 것 같은지 이유를 설명한 후에, 공손하게 환불을 제의했다. 구매를 원하는 사람을 판매자가 나서서 말리고 있는 보기 드문 광경. 재미있는 부분은, 그 전까지는 내가 15만원짜리 책을 사는 것이 경제적인 선택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했지만, 정작 환불 제의를 받고 나니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겼다.
"대체 어떤 책이길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환불제의는 오히려 구매를 위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15만원이 아깝지만, 어떻게든 그 책을 두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출판 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배송 역시 예정보다 지연되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책을 받았다.
택배 상자는 고급스러운 검정 상자였다. 겉표면에는 책에 실린 사진 중 한 장이 붙어있었다.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이 검은 상자 자체가 무척 예뻤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중으로 포장을 해서, 택배 상자를 열고 나면 그 안에 이 검은 상자가 있고, 그 검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면 책이 들어있는 구성도 좋았을 것이다. 검은 상자 그대로 배송을 보냈기 때문에 택배 송장도 붙어있고, 배송 과정에서 여기저기 구겨지고 찌그러져있었다. 아쉽지만 버려야했다.
표지는 화려하지만 간결했다. 제목 Howling이 화려한 글씨체로 휘갈겨져있었고, 금박처럼 반짝이는 잉크로 인쇄가 되어있었다. 표지는 고급스러운 하드커버로 되어있었다. 이제 그토록 궁금했던, 마술 하나에 15000원의 가치를 책정했다던, '그 마술들'을 직접 확인해볼 시간이었다.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자.
드디어 영접한 하울링
1. Imaginary Dice
현상
마술사는 예언을 하고, 관객은 주사위를 굴리는 상상을 한다. 어떻게 굴리든 관객의 예언은 마술사의 예언과 일치하게 된다.
예언 마술에 대하여
진짜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예언 마술은 두 가지 기법 중 하나를 따른다. 첫 번째는 예언에 관객의 선택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선택의 과정에서 트릭이 들어간다. 예를 들자면 예언으로 7스페이드를 꺼내놓고, 관객에게 기술을 써서 7스페이드를 고르게 만드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관객의 선택에 예언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예언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트릭이 들어간다. 예를 들자면 예언으로 빈 종이를 내려놓은 후에 관객이 말한 단어를 몰래 빈 종이에 써넣은 후 그것을 공개하는 방식이다.
두 가지 방식 모두 각자의 장단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두 가지 방식을 결합시킨 결과물이 imaginary dice 라는 마술이라고 한다.
이 마술의 장점은 먼저, 종이와 펜만 있으면 가능한 마술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마술의 구성이 치밀하다. 마음을 읽는 마술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이 나중에 떠올렸을 때 모든 마술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마술사가 그런 행동을 했구나!"
이 마술에서는 아주 작은 미묘한 떡밥이 사용된다. 이 떡밥이 훌륭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을 때는 관객이 그러려니 하고 잊어버릴 수 있지만, 필요할 때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똑똑하고 관찰력이 좋은 관객에게 더더욱 이 무기는 강력하게 작용한다.
단점은 항상 예언을 확인시켜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언을 확인시켜주려면 사전에 미리 준비를 한 다음 손기술을 써서 바꿔치기를 해야한다. 이 단점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 마술을 영상통화로 진행하는 것이다. 영상통화에서도 현상은 100% 전달되지만 관객은 예언을 직접 손으로 만지거나 빼앗을 수 없다.
이 마술에서 관객은 상상을 할 뿐,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마술사는 관객의 상상을 교묘하게 비틀어 마치 관객이 무언가를 선택한 것처럼 만든다. 그렇게 상상을 선택으로 만드는 과정이, 책을 읽었을 때는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검증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나만의 우려로만 남겨둔다.
2. Vlood 2
현상
관객이 마술사의 힌트를 통해 마술사의 혈액형을 맞힌다. 마술사는 힌트 없이 곧바로 관객의 혈액형을 맞힌다.
로직퍼즐(Logic puzzle)에 대해서
마술사는 교묘하게 잘 짜여진 질문을 던진다. 관객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질문은 논리적으로 잘 짜여져있다. 따라서 마술사는 대답을 듣고 관객이 숨기고있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로직 퍼즐 기법의 장점은 언제나 100% 확률로 마술이 성공한다는 점이며, 또한 수학과 학생이 아예 작정하고 분석하지 않는 이상, 공연 환경에서는 해당 트릭의 작동 원리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점 역시 존재한다. '질문의 대답을 통해서 답을 얻어내는 거 아냐?' 라고 관객이 유추하는 순간, 로직퍼즐의 치밀한 논리 구조와 별개로 마술의 신기함은 크게 떨어진다. 마술의 과정을 관객이 되짚어보는 것은 마술 용어로 백트래킹(Backtracking)이라고 하는데, 백트래킹을 방지하기 위해 Vlood 2는 마술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원래의 마술 현상은 다음과 같다.
1-1. 관객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혈액형을 맞힌다.
1-2. 관객의 실제 혈액형을 맞힌다.
이렇게 하면 1-1.의 대답이 1-2.의 대답과 관련이 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둘 다 관객의 마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마술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서 마술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문제를 해결했다.
2-1. 관객이 마술사의 혈액형을 맞힌다.
2-2. 마술사가 관객의 혈액형을 맞힌다.
이제 2-1.의 질문과 2-2.의 질문은 더 이상 서로 관련되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특히 2.의 대답을 얻어내기 위해 마술사는 관객의 집중을 분산시키는 질문 하나를 던진다. 그 질문은 사소하지만 관객의 백트래킹을 훌륭하게 끊어낸다.
하지만 여기서도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이 과정에서 마술사가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관객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혈액형이 자신의 혈액형이라고 거짓말을 해야한다. 혈액형 따위의 사소한 거짓말이 무슨 문제냐고 반론할 수도 있지만, 아마추어 마술사는 마술 속에서 거짓말을 최대한 줄여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게다가 아마추어 마술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마술을 보여줄 상황이 많다. 그런데 Vlood 2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마술사의 혈액형이 마술을 할 때마다 자꾸 바뀌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 마술을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다. 바로 가상의 캐릭터를 만든 다음, 관객이 가상의 캐릭터의 혈액형을 맞히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 부분은 가상의 캐릭터가 마술사에게만 몰래 관객의 혈액형을 말해주고, 그것을 마술사가 전달해주는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Vlood 2의 가장 아쉬운 부분은 이 마술의 기반이 '혈액형 성격론'이라는 것이다. 혈액형 성격론은 2020년대에 들어 우리가 MBTI라고 부르는 "16가지 성격 유형론"으로 거의 완전히 대체되었다. 헌혈의 집이나 병원을 제외하며,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의 혈액형을 묻지 않는다. 어쩌다가 혈액형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소심한 A형'이나 '이상한 AB형' 따위의 성격론은 더더욱 듣기 힘들다. "개인이 각각 갖고 있는 4가지 유형" 이라는 카테고리로 치환해서 다른 소재를 찾아본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렇게 하면 마술의 많은 부분을 다시 손봐야할 것이다.
3. Subliminal (듀얼 리얼리티)
현상
마술사는 서브리미널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관객은 카드 한 장을 고르고 기억한다. 하지만 사실 관객은 카드를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관객이 기억했다고 생각한 카드는 사실 마술사가 카드 뭉치 맨 밑에서 계속 은근히 보여주고 있었던 카드였다.
듀얼 리얼리티에 대해서
서브리미널은 Q&A포스와 함께 하울링에 실린 유이한 카드마술이다. 그러나 어려운 기술이나 복잡한 원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무척 단순한 기술과 기법으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이 마술의 진짜 핵심은 듀얼 리얼리티이다. 듀얼 리얼리티는 말 그대로 2개의(dual) 현실(reality)이라는 뜻이다. 관객 A가 경험하는 현상과 관객 B가 경험하는 현상이 다를 때, 그 마술을 우리는 듀얼 리얼리티가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두 명의 관객이 서로 다른 현실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기법이다.
맨 처음 듀얼 리얼리티를 접했을 때는 무척 신비로웠다. "같은 마술을 보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경험을 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듀얼 리얼리티는 오히려 위험한 방법이다. 그 위험이란 바로 A와 B가 서로 다른 현상을 경험한다는 것 자체이다. 만약 A와 B가 서로 친한 사람이어서 마술이 끝난 후에 서로 대화라도 한다면? 무척 높은 확률로 마술의 신기함이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마술사들은 왜 듀얼 리얼리티를 사용할까? 듀얼 리얼리티의 장점은 그만큼 강력한 현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서브리미널'이 그 예다. "관객이 고른 카드를 잘못 기억한다." 라는 현상은 듀얼 리얼리티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든 현상이다.
또한 듀얼 리얼리티가 적용된 마술을 할 때는 중의적인 표현이 무척 중요하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현실 속에 있는 A와 B 각자에게 어울리는 의미로 전달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한상황에서 서브리미널의 대사는 훌륭한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마술의 주된 소재는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심리 효과이다. 나는 마술사가 심리 효과를 자신의 마술 패터에 집어넣으려면 무척 신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관객에게 해당 심리 효과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멘탈 마술은 '왠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라고 관객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에서 서브리미널이라는 마술에 대한 강한 위화감을 느낀다.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작동하는 효과였어?"
"서브리미널 효과가 기존의 카드를 잊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카드를 덮어씌울 정도로 강력한거야?"
4. Be a good mentalist
현상
마술사는 관객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시도하지만 세 번을 내리 실패한다. 하지만 예언을 펼쳐보면 마술사가 어떻게 실패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적혀있다.
처음에 이 마술의 현상을 들었을 때, 실패를 예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다. 실패를 예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관객이 40을 생각했다고 가정하자. 마술사는 32라고 실패한 다음, 예언을 연다. 예언 속에는 '관객의 숫자보다 8 적은 숫자로 실패해라' 라고 적혀있다.
처음에 현상만 읽었을 때는 실패를 예언하는 것이 성공을 예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관객이 생각한 숫자가 40인지 알 수 없다면 애초에 실패를 예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설 부분을 읽고 생각이 변했다. 저자는 널리 쓰이는 연출 하나와 기법 하나를 섞었다. 하나는 '의도된 실수'라는 연출이고 나머지 하나는 'One ahead principle'(이하 원어헤드)라는 기법이다. 이 마술은 두 가지의 평범한 기법을 섞어서 만든 가장 독특한 마술이었다.
의도된 실수와 원어헤드
먼저 '의도된 실수'는 마술사의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마술사는 실수하지만 그 실수가 사실은 의도된 연출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카드 마술을 할 때 일부러 고른 카드가 아닌 다른 카드를 꺼낸 다음, 그 카드가 아니라는 관객의 말을 듣고 그 카드를 고른 카드로 바꿔버리는 식이다. 한번 '의도된 실수'를 경험한 관객은 마술사가 진짜로 실수를 했을 때도 "저것도 의도된 실수일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나를 포함한 많은 마술인들이 '의도된 실수'를 좋아한다.
원어헤드와 가장 비슷한 한국어로 된 표현을 찾아보자면 "마술사는 언제나 한 발 앞서있다." 정도가 있다. 원어헤드를 사용하면 관객이 정말 아무거나 생각해도 마술사가 그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낸 것처럼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원어헤드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을 몇 가지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밝힌다. 그러다가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바로 이 모든 과정을 의도적으로 실패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의도된 실수'가 들어온다. 단순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을 일부러 실패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다. 마술사가 성공했을 때는 당연히 해야할 행동을 실패했을 때는 할 필요가 없다. 성공했을 때 하지 않을 행동을 실패했기 때문에 해야할 때도 있다. 모든 마술 기법과 연출은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의도된 실수'와 '원어헤드'는 마치 퍼즐 조각처럼 절묘하게 서로 맞아들어간다.
나는 마술사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의도와 목적이 담겨있어야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Be a good mentalist는 말과 행동이 잘 짜여진 마술이다. 이 마술에서 걱정되는 점은 실패하는 연기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중 의외로 쉬운 방법을 하나 소개한다. 그것은 바로 마술을 진짜로 실패하는 것이다. 진짜로 실패했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을 기억하고 나중에 마술을 실패한 척 연기할 때 활용하면 좋다.
혹시나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살짝 알려주자면, 나는 실패하면 말이 많아지고,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곧바로 이를 숨기기 위해 밝아진다. 그리고 실패를 수습하기 위해 주변 마술도구를 만지작거린다.
5. Lock
현상
자물쇠의 세 자리 비밀번호를 관객이 알아맞힌다.
이 마술을 읽고 예전에 어느 공연에서 보았던 마술이 떠올랐다. 그때는 열쇠식 자물쇠를 사용했었다. 진짜 열쇠 하나와 가짜 열쇠 수십 개를 섞어놓은 후, 관객이 그 중 아무 열쇠를 집어들면 그것이 진짜 열쇠였던 마술이었다. Lock의 현상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 마술에서 열쇠식 자물쇠를 번호식 자물쇠로 바꾸어놓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장점
이 마술과 다른 자물쇠 마술의 가장 큰 특징은 평범한 자물쇠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물쇠 마술은 특수한 장치가 달린,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자물쇠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마술은 우리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자물쇠를 사용한다. 이것은 분명한 큰 장점이다. 게다가 이 마술을 만들기 위해 저자는 직접 노력과 관찰, 연구 끝에 평범한 자물쇠가 가진 기계적 특징을 이용해서 이 마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끈기와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단점 - 기법
그러나 이 마술은 자신이 가진 장점을 온전히 살리지 못하는, 불완전한 마술이다. 가장 먼저 기법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이 마술이 갖고있는 가장 큰 이점은 평범한 자물쇠를 사용한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의 자물쇠를 빌려서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나 군대를 제외하고 자물쇠를 사용하는 환경은 드물다. 기껏해야 자전거 잠금장치 정도? 문을 잠글 때는 도어락을 사용하고 여행용 캐리어에는 자체 잠금 장치가 설치되어있다.
그렇다면 차선책은 뭘까? 바로 마술을 시작하기 전에 마술사가 준비한 도구에 어떠한 이상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Lock은 사전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마저도 불가능하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자물쇠를 사용한다는 이점은 어마어마하지만 정작 그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쉽다.
단점 - 소재의 활용
두 번째 단점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바로 소재의 활용에 대한 부분이다. Lock의 현상은 다음과 같다.
"관객이 잠재 능력과 직관을 사용해서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맞힌다."
"관객이 잠재 능력과 직관을 사용해서 미리 적어놓은 세 자리 숫자를 맞힌다."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단지 "미리 적어놓은 세 자리 숫자"로 대체해도 이 마술 현상은 크게 다른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Lock이 자물쇠라는 소재가 가진 특징을 100%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물쇠라는 소재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보안'이다. 자물쇠의 목적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비밀. 독점하고 싶은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해서 금고를 만들고 자물쇠를 걸어잠근다.
하지만 만약 관객이 처음보는 자물쇠의 비밀번호를 직감을 통해 바로 알아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비밀번호든 열쇠든 자물쇠를 열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물쇠가 감추고 있는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그 안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을까? 자물쇠라는 소재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비밀'이다.
예를 들어 애인이 준비한 깜짝 선물 상자의 비밀번호를 본인이 직접 알아낼 수도 있다. 또는 공연에서 사용할 중요한 상자를 열지 못해 당황하는 마술사를 관객이 도와줄 수도 있다. 혹은 마술사의 부끄러운 흑역사가 담긴 일기장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Lock은 그 자체로도 좋은 마술이지만, 더 큰 잠재력을 품고있는 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3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