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누구일까?
얼마 전 '유퀴즈'를 보는데, 나도 모르게 주륵 눈물이 흘렀다.
TV보면서 우는 스타일이 아닌데, 나도 나이를 먹었나 싶었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불켜지 않은 깜깜한 방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이 날 '구글 수석 디자이너' 분이 나오셨는데, 한마디 한마디에 짧은 공감을 하다가
이 말에서 얼었던 물이 한번에 녹아내리듯, 심장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썸을 타야하는데, 자꾸만 연애를 하니까 속이 상하고, 억울하고, 마음이 다친다는 거였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격하게 공감해서.
직장과 나를 동일시하면 안되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일'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직장이 곧 나였다. '어디 다닙니다. 이런 일을 합니다' 라고 말하는 게,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생방송을 하고, 회의를 하고, 원고를 쓰고.
집에 와서도 '작가'와 '나'라는 사람을 분리해야 하는데, 그게 좀처럼 안됐다.
퇴근을 했지만 내 머리는 쉬지 않았다. 또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SNS, 인터넷, 각종 카페들을
돌아다니면서 방송 소재가 될만한 것들을 찾았다. 잠을 청하다가도 불현듯 뭔가가 떠오르면 눈 한쪽을
찡그리고, 휴대폰 메모장을 열기도 했다. 그 탓에 휴대폰으로 눈탱이 맞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오롯이 '직장'에 올인을 하고 있었다.
일에 대해,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해 불만이 생기고, 서운함이 생기기 시작한 건.
돌이켜 생각해보니, 지나치게 과몰입 한 게 아니었을까.
구글 수석디자이너님의 표현대로 '연애'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직장과 연애를 하다보니, 온종일 내 머릿속에는 직장 생각 뿐이었다.
혹여 내가 기대한 피드백이 오지 않으면, 나는 몹시 불안해하며 마음에 드는 피드백을 얻기 위해 고치고,
다시 쓰고, 새로 쓰고를 반복했다.
이런 반복은 어느샌가 '만족'하는 법을 잊게 만들었다. 언제나 부족한 점만 보이고,
스스로 무능하다 탓한 적도 많았다. '눈치'보는 일이 많아졌고, 내 기분보다도 다른 누군가, 다른 무언가의
기분부터 살피게 됐다.
일이 잘못되면 내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조금 쉬어도 돼'라는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른 이의 글을 보며, 끊임없이 나를 비교했고 그 때마다 좌절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웃음을 잃어갔다.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고,
예민함은 누군가에게 가시돋힌 말이 되기도 했다.
내가 가진 것보다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늘어갔고,
나는 왜 이정도 밖에 안될까. 나는 왜 이걸 못할까. 나는 왜 여기까지일까.
직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나는 내 자신을 탓하고 괴롭혔다.
그러다가 인정을 받으면 한껏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그 때만 잠깐 나를 토닥였다.
그런데 만약! '직장'과 연애하는 게 아니라, '썸'만 탔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고, 부족함을 더 크게 보고, 쉬는 걸 불안해하고,
나는 왜 나일까... 라며 자책했을까...?
연애와 썸의 차이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 썸은 간섭과 구속이 없다. 딱히 예민할 필요도 없고, 그저 서로 호감상태일 뿐.
고정된 관계가 아니다보니, 책임이나 부담이 적다.
한마디로 썸은 '아니면 말고', '어쩔 수 없지' 정도로 생각하면 되려나?
여기서 '아니면 말고', '어쩔 수 없지'는 내 마음이 다치지 않게 하는 좋은 무기 중에 하나다.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내가 과연 이렇게 생각할 날이 올 수 있을까.
'최선을 다했지만,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상대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 아니면 말고!'
'그러다가도 인정받고 알아준다면, 하하하. 행복하군!'
이렇게 툭툭 털어내면서, 집에 돌아오면 온전한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작가'라는 한 단어로 끝나버리는 내가 아니라,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 손재주는 있는지, 어떤 운동을 잘하는지,
지금 새로 도전하고 싶은게 있는지, 나여도 괜찮은지...
잔잔히 돌아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 직장과 썸을 타봤어야 알지.
직장과 연애할 게 아니라, 썸만 타야하는데...
그 썸타기가 내겐 너무 어렵다.
어렵지만, 벗어나보려 한다.
이 미친 연애에서. 지긋지긋한 연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