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 작가님과 함께 하는 글쓰기 수업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에는 교보문고에서, 밴드에서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왔다. 교보문고에서 쓰던 글은 모아서 문집으로 만들어 추억이 되기도 했는데, 교보문고에서 블로그 운영을 중단하여 글 쓸 곳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그래서 밴드에서 다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즈음 회사 일이 바빠져 글을 중단하게 되었다. 올해 초 나는 노한동 작가의 책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을 읽고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밴드에 올려놓았던 글을 복사해서 브런치를 신청했고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러니 내가 가장 먼저 쓴 것을 책을 읽은 감상문이었다. 노한동 작가의 책으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읽고 있던 책들도 방향을 잃고, 사재기만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한동안 공부를 하던 탓에 읽은 책들은 모두 전공 서적이어서, 인문이나 소설 등 책은 조금 거리가 생겼다. 책을 다시 읽으려니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마음은 생경한 것이었다. 읽던 습관이 있으니 쌓아 두었던 책을 사탕을 까먹듯 까서 읽고, 서점을 나서도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었다. 그래도 읽었던 책을 리뷰를 써서 브런치에 올리자 조금 공간이 생겼다. 나도 모르게 읽기만 하다 보니, 더 넣을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공간을 조금씩 비워가니,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고 시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시를 다시 쓰고 있다. 올해 변한 것 중의 하나는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의 학부모 독서 모임에 가입한 것이다. 나는 내성형 인간이기도 하고 학부모 모임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라 가입을 하는데 많이 망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책을 읽고 싶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망을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책을 읽고 쌓아놓기만 했을 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이 책이 좋다고 추천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 처지가 브런치로 와서 책에 대해 쓰고, 추천도 하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를 쓸 수 있는 처지로 바뀐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나는 알면서 모른 척한 것인지, 바쁘니 외면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올해 시작된 새로운 경험들. 브런치에 가입해서 작가로 글 쓰는 나와 독서 모임에서 책에 대해 토론하는 나, 그런 내가 생겼다. 거기에 시를 쓰는 내가 더해지고, 매거진에 참여하면서 소설도 쓰게 되었다. 사람이 편안해지면 욕심도 커지는 법. 나는 책을 소개하고, 노래를 소개하고, 시를 소개하고, 읽는 책도 쓰고, 소설도 쓰고 있는 것이다. 평일 저녁 퇴근하면 아무도 없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집에 가면 씻기고, 밥 먹이고, 숙제하면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조금 커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퇴근 후에 공부했으니, 나는 해야 할 일을 해왔던 것이다. 아이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고, 나는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 나니 이제야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노한동 작가의 책이 아니었더라도, 브런치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쓸 수 있는 자리를 찾아냈을 것이다. 쓰는 일은 눈덩이 같다. 내가 눈을 하나 뭉쳐서 굴리면 눈덩이가 불어나듯, 나는 내 브런치를 그렇게 키워왔다. 그 브런치를 쓰는 일이 나의 즐거움이고 보람이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왜 쓰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왜 쓰는가. 나는 나를 돌보고, 어린 나를 다독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래서 매거진에 참여한 톡방에서 글이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한 분께서 내 글에 대해 진지하게 말씀해 주셔서 나름의 결론을 얻어냈다. 나는 위안을 주는 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 나의 은사님께서 쓰신 [낯선 익숙함을 찾아서]에 나온 김중미 동화 작가처럼, 외치는 글, 읽는 사람이 깨닫는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은 이 시대의 사각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글, 나만 잘 살자고 하는 글이 아닌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글이다. 하지만 나는 깜냥이 되지 않으므로, 지금 쓰는 글에 조금 더 집중하기로 한다. 그래도 시를 소개하는 방향이 잡혀서 마음이 개운한 부분이 있다. 그런 깨달음의 끝에 탄생한 것이 [묘비명]에 대한 글이다. 묘비명을 통해 인생을 돌아보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 글은 나의 글쓰기 의미를 담은 시작이 될 것이다. 거창하게 내 앞으로의 인생이 어떠할지는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는 학비를 벌어서 졸업시킬 것이며, 그들이 졸업한 후의 인생은 남편과 설계해 나가고 있다. 남편에게 나는 은퇴하면 일주일에 한 번은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지금부터 쓰는 글쓰기는 그때에는 조금 더 자리 잡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글쓰기가 목적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이자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을 믿는다. 글을 잘 쓰고 싶은 것은 내 생각을 좀 더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다. 멈추지 않고 퇴고 없이 23분 동안 글을 썼다. 이 글도 그냥 쭉 쓰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써보기로 한다. 미래의 나는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시도 쓰고, 동화도 쓰고, 소설도 쓰고 싶다. 언젠가 밝힌 적이 있는데, 나는 길게 써서 줄이는 형태로 글을 쓰기 때문에 시나 동화가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한 문장은 열 개의 문장을 줄인 것이므로 나는 길게 쓰는 재주는 없으나 줄이는 재주는 좋다. 아마 회사에서 보고서를 만들면서 다듬는 일에 익숙해져서 인지도 모른다.
내가 브런치에 들어오기까지의 일, 브런치에서 쓰는 일, 앞으로의 글쓰기에 대해 썼으므로, 추가적으로 나에 대해 조금 더 써보고자 한다. 나는 [설애]라는 필명을 가지고 있다. 이 필명은 고등학교 때 만든 것으로 그 필명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다. 고등학교에서는 동아리가 없었는데, 비공식 글쓰기 동아리가 있었다. 지금이야 동아리 활동을 격려하는 분위기이지만, 그때는 쓸 때 없는, 공부와 관계없는 동아리를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내게 어떤 쪽지가 전해졌다. 비공식 글쓰기 동아리에 초대한다는 쪽지였다. 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글쓰기 동아리를 공식적으로 만들었다. 동아리 지도 선생님은 생물 선생님, 그리고 글 쓰는 애들을 몇 명 모았다. 그러니까 나는 반골 기질이 있어서, 왜 동아리를 못 만들게 하느냐는 일종의 시위를 한 것이다. 정식 절차를 찾아서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다. 숨어서 글을 쓰고, 동아리를 만들고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 양 쪽지로 청하는 그 순서가 나에게는 통하지 않은 것이다. 이 일화에서 보듯이 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데, 가끔 일을 지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인생은 짧아서 머뭇대다가 죽어버릴 수 있다. 유명한 묘비명이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그럴 줄 알았지.' 이 묘비명은 오역된 것이라고 하는데, 잘 번역이 되면 '시간이 흘러 그럴 때가 되었지.' 정도라던가. 나는 인생은 한 번뿐이고 연습은 없고, 내 과거가 힘들고 어렵다고 징징댈 시간에 책이라도 한 자 더 보는 것을 택했다. 내가 살아온 힘은 책에서 많이 얻었으며, 사람은 흐르고 지나가도 책은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을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신혼 때는 책을 읽느라 옆방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남편이 어느 날은 좀 기분이 상했는지, 불을 꺼 놓고 책을 들고 옆방으로 가서 책을 읽는 나에게 책이 좋아, 내가 좋아하고 물었다. 뭐, 당연한 질문을 하는가. 나는 책이 좋다. 그랬더니 불같이 화를 내고 가버렸다. 그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이었다. 지금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즈음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다 읽고, 특히 이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던 책이니, 이 책 보다 남편이 더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지금도 남편은 내가 책 보고 있으면 심기가 불편하다. 좀 달래가면서 살아야 하는데, 나도 대쪽 같은 면이 있어서 왜 책도 못 읽게 하느냐고 많이 싸웠다. 이제는 부르면 가서 집안일을 하는 척하고, 옆에서 같이 게임도 좀 하고, 커피도 타주고 온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좀 더 생생했던 30대에는 그런 여유, 그런 요령 같은 것이 없었다. 사실 아이 둘을 키우며, 회사 다니기도 힘든데, 잠깐 책 읽는 나를 방해하는 게 너무 싫었다. 브런치를 하면서 새로 생긴 습관이 하나 있는데, 주말에 늦잠을 자는데, 그래봐야 애들 학원 시간에 맞춰 9시에는 일어나서 밥 먹여 보내야 하는 정도의 늦잠이다. 평일에는 6시 30분에 일어난다. 원래 주말에는 늦게 일어났는데, 주말에도 똑같이 일어나서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쓴다. 남편이 일어나서 너 뭐 하냐고 물어봐서 글 쓴다고 했더니, 처음에만 신기해하고 그런가 보다 한다. 노트북을 다 아이들이 써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는데, 너무 불편해서 얼마 전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샀더니, 글 쓰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돈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이건 나를 위한 선물이라며 나는 너무 즐거워했다. 게다가 핑크다. 블루투스 키보드용 핑크 가죽 커버도 샀다. 정말 멋있다. 그 핑크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글을 쓰면서 아침에 아이스 아메리키노를 마시는 일. 요즘 나의 행복은 그런 시간에 있다. 46분. 한 참 쓴 것 같은데 아직 14분이나 남았다. 정윤 작가님. 혹시 글 쓰는 한 시간은 다르게 흐르나요?
아, 얼마 전에 공모전에 응모했다. 이미 브런치에 올리긴 했는데, 사람이 무서운 현실에 관한 글이었다. 그 글을 쓰면서, 이렇게 글 쓰는 게 맞나, 쓰고 싶은 것과 써지는 것이 다르다는 현상을 직면했다. 그러니 이렇게 연습하고, 글쓰기 수업을 받기로 다짐한 것이다. 지금은 회사 점심시간이다. 글 쓰기로 마음먹었으니, 점심은 삼각 김밥으로 때우고 쓰고 있는 중이다. 나는 지르기도 하지만, 실행력이 강해서 그냥 하는 편이다. 고민하는 시간에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가끔 일을 벌이고 수습을 못하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는 남편이 같이 산다. 그는 수습의 달인이므로 나는 걱정 없이 살고 있다. 나는 행복하다. 아이들도, 가족도, 일도, 안정하여 행복하다. 그 행복 가운데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배고픈 글쓰기는 아니지만, 나에게 필요하고 나름 절박한 글쓰기이다. 더 잘 쓰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 노력할 자세가 되어 있다. 그러니 이 수업 끝의 나를 나는 또 기대한다.
나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이며, 또 배우는 이유이며, 책을 읽는 이유다. 겁나는 것은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해 잘못 전달될 마음이나 글이 칼이 될 수 있는 위험이다. 정확하게 글 쓰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독자들이 읽는 것이 일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나는 그 일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썼을 때, 그 의사가 정확하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첫 번째 숙제를 마친다. 55분. 더는 못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