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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장 Oct 21. 2021

프로젝트 안암(安岩)

#06-6. 사람

#밥

육수가 안정되기 시작하니 밥이 말썽이다. 정확히는 구매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밥솥이 말썽인 것. 

보통은 10시쯤 밥을 안친다. 10/14일 오전 역시 평소처럼 밥을 안쳤고, 같은 루틴대로 재료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픈 20분 전 밥은 취사-뜸-보온 상태 중 보온으로 넘어가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밥을 푸려고 준비하는 찰나, 아뿔싸. 취사 버튼을 안 누른 건가...??? 


이런 경우 뜨거운 물에 쌀을 담가 둔 것 같은 상태가 되어 바닥 부분의 밥은 부서진 상태가 되고, 위의 밥은 설익은 상태가 된다. 응급처치 후 나갈 수 있는 상태까지 만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건 마찬가지. 

어찌 취사 버튼을 안 누르는 실수를 했을까 싶고, 매일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다 보면 그런 실수를 했을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취사 버튼을 누르던 기억이 떠오르면서도 그게 어제 기억인지 오늘 기억인지 확신이 안 선다.

한 명이 더 있었으면 서로서로 재료 준비하면서 한 번 더 체크하고 수정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그 아쉬움이 직원을 못 구하고 있는 상황에까지 이어진다. 어쨌거나. 


급하게 오픈 일정이 미뤄졌단 양식을 프린트를 해서 문에 붙이고, 약 20명의 손님을 돌려보낸 후에야 준비된 밥으로 서비스. 그냥 해프닝이려니, 매출을 날린 건 잊자. 싶었지만. 

테스트했었던 감자뼈 국밥. 맛있었다. 번거로움을 해결하지 못한 편


#밥 2


해서 15일 오전 밥을 안칠 땐 코드가 제대로 꼽혔는지, 취사는 제대로 눌렸는지 모든 상황을 체크. 마침 컨디션이 안 좋은지라 시간을 버려야 했지만 꾸준히 체크했고, 보온으로 넘어가는 과정까지 확인했다. 

뜸을 들이는 동안 다른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글쎄. 


또다시 뜨거운 물에 반신욕 중인 쌀. 

아.... 나 비싼 쌀 쓴단 말이야.... 

덕분에 또 한 번 점심 매출이 반쪽 났다. 오셨던 분들께 하나하나 설명을 하고, 앉았던 분들을 일어서서 나가도록 유도하는 건 참 가슴 아프다. (심지어 한 팀은 어제 오셨다가 같은 문제로 돌아가셨던 분들이었다.)

한번 더 새 밥을 준비하면서 A/S 기사 통화, 근처 하이마트와 삼성플라자에 퀵으로 받을 수 있는지 문의, 손님들께 양해 구하기,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밥이 지어지는 동안 기사님이 방문했고, 단순한 모양을 한 밥솥의 문제가 될 이유는 2-3가지 정도로 유추된다고 한다. 물과 온도센서. 


같은 양의 물과 같은 양의 쌀,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밥을 짓는데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건가. 

2번째 밥은 제대로 되었고, 해서 다시 새로운 밥으로 손님들께 식사를 제공하게 되었다. 

온도 센서를 변경하고, 새로운 밥통을 구매했지만 불확실함은 없어지질 않는다.


#밥 3


그렇게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밥이 지어져도 사실 비싼 쌀의 특징은 크게 무너지진 않는다는 것.

밥을 하고 수분을 날려주는 작업을 끝내고 쌀의 겉표면에 전분질이 많이 남지 않도록 처리를 해주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그제야 만족도 92-97을 왔다 갔다 하는 밥이 나온다. 국밥에 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는 손님들이 식사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재료가 몇 가지나 되는가에 따라 중요도를 달리하는데, 그렇다 해도 개인적으로 국밥에 사용되는 원재료 중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것은 쌀이다. 제대로 조리된 쌀밥의 쌀은 겉표면에 전분질이 많이 묻어나지도 않아서 국물을 맑은 상태로 유지시켜 주거니와, 입 안에서 씹는 과정을 거치면서 단맛을 내놓기 때문에 입안에 탄수화물의 단맛을 듬뿍 나게 해 주고, 그 맛이 국물과 어우러지면서 국밥을 먹고 있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다. 해서 좋은 국밥집의 쌀은 크랙(부서진 부분)이 많이 없고 쌀의 크기가 일정하여 수분을 골고루 머금어 밥이 다 지어지고 나서도 모양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한데 오전의 경우처럼 밥이 지어지다 마는 경우가 생기면 밑에 있는 쌀은 불어 부서지고, 수분이 일정하지 않아 전분이 호화되어 전분물을 만드는 채로 밥이 지어지는데, 이는 밥을 뜰 때 숟가락이나 주걱에 묻은 수분이 마르는 모습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수분이 증발하고 전분이 얇게 펴져 주걱에 달라붙어 있다가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면 아.. 오늘 밥 좀 불편해졌어.. 하게 된다. 

듀록은 지방 배치가 고운 편이다.

사실 그렇게 밥을 지어도 87-89 정도의 퀄리티는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태 같은 디테일의 차이가 일반인과 요리사의 차이라고 믿는 나로선,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용인했다는 게 창피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좀 덜 가져가더라도, 원가 계산이 좀 바보 같더라도 손님들과 웃으면서 대화할 수 있는 이유는 돈 좀 벌자고 음식에 장난치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이다. 입엔 좀 안 맞을 수도 있지. 음식이 취향인데. 그렇지만. 


#손님의 피드백 


의외로 남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의외로 남의 행동을 잘 관찰하는 편이다. 그런 성격이 모여 객관적으로 피드백을 멀찍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주는데, SNS나 플랫폼에서의 리뷰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의견을 다각화하여 보려고 노력한다. 주로 행동을 관찰하고 잔반의 결과를 확인해서 손님들이 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추하는 습관이 있고, 직원일 땐 장점으로 작용했다. 이게 사장이 되니까 다르다. 음식은 당연히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 하면서도 매니아틱 하다거나, 못생겼다는 소릴 듣거나 하면 어??? 왜???? 하게 된다. 음식 맛에 캐릭터 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는데, 어???? 이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느 날엔 두 그릇을 드신 손님이 아.... 겨울에 비름 안 나오면 어떻게 하죠...? 하시고, 어느 날엔 아... 비름 꼭 쓰셔야 해요?? 하는 손님이 계신다.

같은 날에 한분은 쌀이 안 익었다고, 한분은 밥이 퍼지지 않아 좋다고 하신다. 

청양고추기름이 너무 맵네요 하시는 분과, 청양고추가 들었다고요??? 하시는 분 역시 같은 날 등장하신다.

안 좋아하시는 분은 안 오시겠지 하면서도 모두에게 사랑받길 원하는 부모의 마음 같은 거랄까. 취향의 문제라는 생각은 제삼자일 때나 평정심을 찾는다. 식사가 입에 안 맞는 분들의 표정을 보고 있기란 잔혹하기 짝이 없다. 


#사람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

그 모든 과정을 이해시키는 게 사람이다. 힘들어 죽겠네 싶으면서도 번뜩 정신을 차리게 되는 건 내 주변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다. 사실 공사 끝났을 때 이제부턴 내 몫이다, 다른 핑계 댈 것 없다. 생각했었고, 주변 사람들 도움받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보다 가게 운영도 순항 중이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도 계셔서 차곡차곡 내 길을 가도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금도 여전히 혼자서 할 순 없는 일들 뿐이다. 연남동에서 저녁 장사를 하면서 매주 평일이면 점심때마다 와서 도와주고 있는 준표 형, 주말이면 하기 싫어 죽겠다고 차라리 연락을 끊자는 진보, 유리는 깼지만(자기는 모른다.) 매번 쉬는 날이면 달려와 도와주는 우리(이젠 자기 쉬는 날 안 알려준다.) 가게 운영하면서 실수를 덜 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조언해주시는 옥 셰프님, 비싼 몸값 햄버거 하나로 때우면서 달려와주는 청담동 장셰프님. 맨날 때려치운다면서 성수동에서 자리 잘 잡고 있는 이 셰프님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지인 찬스 쓰는 일정도 이제 거의 끝물인데, 사람이 안 구해진다. 


#사람 2


그 사람이.. 지금까지 잡코리아 리크루팅에 사용한 금액은 30, 알바몬에 사용한 금액 역시 비슷하다. 

광고를 안 하면 16페이지 32번째 줄에 있는 국밥집 사람 구함 글을 누가 보겠는가. 리크루팅 역시 자기 PR 시대다. 새로 생긴 음식점일수록 PR내용이 마땅치 않고, 다이닝에서도 워라밸을 찾는 요리사들이 많아진 시대에 내가 찾을 수 있는 직원이 있나 싶다. 나 같은 소자본 창업자가 리크루팅에 60을 쓰고도 직원을 못 구하고 있다. 후배에게 물어보니 다들 일은 안 하는 거 같은데 돈은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래..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지. 그래도 언젠가 일은 시작할 거지..? 근데 얘들아, 나 국밥만 할거 아니야.... 다른 음식도 할 거야... 배울 거 없지 않을걸..?? 


#사람 3

기록을 하는 습관을 기르고 싶어서 틈틈이 적어서 올리는 브런치를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읽어보신다는 점에서 꽤 놀랐다. 왜 이름이 안암이에요? 에서 시작하는 브랜드에 대한 호기심이 읽게 만들었던 걸까. 창업 기록을 공유해서 모두에게 득이 되는 콘텐츠를 만들겠다 같은 대승적 차원의 글짓기는 아니지만, (잠깐 생각했던 적 있다. 하지만 질 좋은 콘텐츠를 만들 능력이 안된다는 걸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의외로 많은 분들이 찾아보시는데, 며칠 전 트위터로부터 유입이 많아져서 당황했다.(당황할 일은 아닌데 당황함) 어떤 분께서 안암을 포스팅해주셨고, 그분이 나의 브런치 역시 리트윗 해주셨다는 사실도 알았다. 트위터는 여전히 어떻게 쓰는 SNS인지 알 수 없지만 감사하여라. 누군가 안암에 관심 가져준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다. 참 고맙다. 아, 오셨던 분들 중에 종종 내가 더 잘되었으면 하고 바라 주시는 손님들이 더러 계신다. 내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날 위해 작고 소중한 한마디를 해주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의 소중함은 하나 둘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잘 알게 된다. 이런 생각과 감정이 나와 함께 일하게 될 동료들도 알게 되면 좋을 텐데. 전달할 방법을 찾고 싶다. 


#주말


주말장사를 어찌어찌한다. 주말에 일할 사람을 따로 구해야 되는 입장이라 무리라는 걸 알지만, 평일 매출이 지금은 더 확실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또 지인들과 약속을 잡기에도 주말에 쉬는 게 낫지만, 그래도 기필코 한다. 오로지 내 경험이 결정의 전부이지만, 나는 언젠가 우리 가게가 누군가의 계획에 포함되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운영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말에 어느 동네를 가서 어떤 음식을 먹고, 누군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계획을 짜고 있을 그 사람들. 시간이 지나 그 순간들이 중첩되면 일부는 안암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우리 가게를 방문할 계획을 짜기도, 또는 북촌이나 삼청을 들른 김에 방문할 계획을 짜기도 하겠지. 


감동의 눈물이 흘러서 뿌연 게 아닙니다. 안 울었어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던 그 순간들의 내가 주말엔 꼭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사람들의 어떤 하루엔 우리 가게가 그 사람들을 설레게 하게도 해보고, 만족하는 하루가 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암의 기획자이자 요리사로서의 욕심이자 로망이다. 그 국밥집에서 일할 때 봤던 손님들, 사실 얼굴도 기억 안나는 몇 년 전 그 손님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여전히 내 삶에 영향을 미치거든. 내 음식과 이 공간이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의 찰나의 순간이라도 변주가 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흥미롭고 기분 좋은 일이야. 

내 하루를 보내는 방식이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순간이기 위한 작업의 연속이라면 좋지 않나. 

그런 손님들의 감정이 중첩되면 언젠가 나타날 우리 직원의 이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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