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
개봉/2008년
감독/앤디 워쇼스키, 래리(라나) 워쇼스키
출연/에밀 허쉬, 크리스티나 리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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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좀 더 읽기
유치(幼稚)하다 ; ① 나이가 어리다 / ② 수준이 낮고 미숙하다
원작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올드팬 혹은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 컬쳐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덕후가 아니라면, 확실히 [스피드 레이서]의 겉모습은 '유치 그 자체'다. 하지만 안은 전혀 유치하지 않다. 만듦새가 조악하지도 않고, 어린 친구들의 코 묻은 돈을 노리는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워쇼스키 형제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탄탄한 작품이라 본다. 외유(幼)내강의 작품, [스피드 레이서]는 그런 영화다.
만화경처럼 화려한 디지털 영상 미학의 극치
풀CG로 처리된 영상은 실사를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 판타스틱한 세계를 온전히 표현하기 위한 [스피드 레이서]만의 화법이다. 실제로는 없지만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종래의 CG라면, 현실의 사물과 인물조차도 환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고, 그 시도는 멋지게 성공했다.
내가 프로젝터와 120인치 스크린을 지르게 된 것도 이 영화의 압도적인 비주얼을 집에서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춘을 위한 최고의 응원
주인공 스피드가 모는 '마하 5'의 매끈한 차체만큼이나 영화의 스토리는 매끈하고 탄탄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직설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영 요즘 영화답지 않다. 평면적이다 - 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하고 싶은 얘기를 러닝 타임 안에 다 쏟아냈다는 인상이다.
꽉찬 이야기와 차다 못해 넘치는 화면 모두 후반부 영화의 정점에서 한번에 폭발, 보는 사람의 감정을 한껏 고양시키고 절정에 이르게 만든다. 갖가지 난관과 한계를 넘어 모든 갈등이 일거에 해소되는 후반부의 카타르시스는 (조금 과장하자면) 이제껏 어느 영화도 도달하지 못했던 영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최고다. 혹자는 이 영화가 전하는 시청각적 쾌감은 마약을 복용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트랜스 상태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말했을 정도다(어떻게 아셨어요? 님 혹시...).
사실 나는 영화 속 인물들이 비장한 표정을 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대사를 읊으면, 감동보다는 거부 반응을 느끼는 편이다. [아마게돈]에서 일렬로 늘어선 주인공 일행이 슬로우 모션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지금도 몸이 막 가렵다. [인디펜더스 데이]에서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자 인류의 독립기념일일 될 것입니다" 운운하며 일장연설을 할 때는 실소가 터지고 만다. 등장 인물들의 과잉 감정에 동조 혹은 동감하지 못하기 때문일텐데, 이상하게도 [스피드 레이서] 속 인물들이 전하는 '뻔한 얘기'에는 빠져들었다. 대체 왜?
이 황당한 영화가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세계 평화이나 인류의 미래, 용감한 희생, 구국의 결단 등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사회로 나와 운이 좋다면 꿈을 펼치거나, 운이 없었다면 야근수당 대신 보람을 던져주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고민에 대해 토로한다.
영화 [스피드 레이서]의 대답은 단순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빨리 달리는 것 뿐'이라면 견고한 벽에 자기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스피드로 돌진하라고. 때론 단순한 응원이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 쪽박 찼다
문제는 이 정도로 영화의 매력에 빠지기 위해서는 관객에게 한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허들은 꽤 높다.
차가 어떻게 800km/h로 달리나 - 같은 부분은 문제가 안된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만화적인 이미지와 원작에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캐릭터들을 감내하지 못하면(이는 철저히 취향의 문제이므로 '못하면'보다 '않는다면'쪽이 더 적절한 어휘다),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에 공감하기 힘들다. 이는 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흥행 성적을 놓고 보면 대중에겐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의 테이스트를 멋지게 살리면서 독특한 매력까지 담아낸 건 확실히 멋진 시도지만, 상업 영화에 요구되는 대중과의 공감대를 놔버린 인상이다. 1억8천만 달러짜리 인디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워낙 만족했기 때문인지,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그려진 [스피드 레이서]는 그다지 보고 싶지 않긴 하다.
다만, 속이야 어떻든 '유치찬란함으로 포장된' 탓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주는 시각적 황홀경, 단순하지만 깊은 공감을 느끼게 하는 야야기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