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연수] 오피스 걸프렌드

첫 사회 친구에게 쓰는 글

by 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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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어감의 ‘오피스 와이프’가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냉혹한 사회에서 첫 시작을 함께한 영혼의 단짝, 긍정적인 어감의 ‘오피스 걸프렌드’가 있다. 각자 남자 친구가 있더라도 사무실 안에서는 영혼을 공유하는 말도 안 되는 쿵짝, 내 첫 사회 친구 연수다.




처음에 만난 연수와 나는 매우 달랐다. 이미 약 1년을 먼저 회사에 다니고 있는 연수는 빠른 연생이라 93년생의 나이로 자신을 소개했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연수가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인 줄 알았다. 그래서 초반에는 연수의 언니 미가 돋보였다. 처음 접해보는 업무에 매번 허덕이고 있는 나와 달리 연수는 사내 메신저를 통해 의젓하게 업무를 지시했다.




‘소정님, 10시까지 완료해주세요.’


‘연수님, 조금 늦게 전달 드려도 될까요?’


‘아니요, 말씀드린 대로 맞춰주세요.’




지금은 소름 돋는 냉정한 커리어우먼 그 자체였다. 초반의 연수는 나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함께하는 점심시간도 샐러드를 먹는다는 이유로 나랑 밥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연수와 단둘이 밥을 먹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밥을 먹으며) 소정 님은 혹시 연애하고 계시나요?”


“아뇨, 지금은 제가 중요해서 안 하고 있어요.”


“아.. 네..”




내향형인 연수가 그나마 건넬 수 있던 친근한 첫 질문은 실패였다. 이때까지도 우리는 관심사가 너무 다른, 세상에서 가장 다른 인간 유형 중 하나일 것이라고 서로를 생각했다. 그러나 1시간 후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억지로) 갔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바로 “케이팝”이었다.




어떻게 이야기가 나와서 서로의 최고 관심사를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야 너도?” “응 나도! 라는 삘이 짜르르 왔을 때 서로에 대한 경계가 녹았을 뿐이다. 이후부터 점심시간마다 연수랑 나누는 대화가 재밌었다. 어색하고 힘든 오전 업무 속에서도 오늘 점심은 뭐 먹지, 출근부터 시작하는 사내 메신저가 회사를 다닐 수밖에 없는 원동력이었다.




우리의 업무 중 하나는 브랜드사에서 받아온 샘플을 자연스럽게, 그러나 감각적으로 찍는 후기 사진 촬영이었다. 그 촬영을 통해 우린 더욱 뉴런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해당 상품을 착용하거나 테스트하는 연수를 촬영하는 시간은 빡빡한 업무 속에서의 재미였다. 이 시간이 되면 우리는 각자의 상사를 욕하거나 오늘 가장 괴로웠던 브랜드 담당자를 욕하거나 우리의 청춘을 욕하거나 등 업무를 핑계로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 또한 그 시간을 거치며 나는 연수로부터 처음으로 “취향”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 수 있었다.




연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취향을 보살피는 친구였다. 상품과 함께하는 연수를 촬영할 때 연수는 나에게 다양한 오더를 내려주고, 다양한 코멘트를 해준다. 이 상품은 이런 컬러이기 때문에 연수의 취향에 알맞은 상품이라고 말해주거나 이 상품의 핏은 연수의 체형을 잘 보완해 줘서 이쁘다거나 기타 등등... 연수는 상품 하나하나에 자신이 애정하는 취향을 덧붙여서 설명했다.




그렇게 3년을 붙어 다녔더니 나 역시 무색무취 내가 좋으면 하고, 별로면 안 하는 취향관에서 벗어나 내가 왜 좋아하는 지 왜 어울리는 지 그래서 어떻게 취향이 되었는지 정의를 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연수는 나의 취향도 세심하게 챙겨주며 나에게 맞는 상품을 추천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사회인이 되어 만난 친구가 처음으로 취향을 알려준 셈이다.




한편 우리의 모습을 정의하자면 한마디로 “청춘”이었다. 각자 사수 격인 MD를 어시하는 AMD로 다른 카테고리에 대한 모든 운영을 담당 했었다. 주체적인 업무가 아닌 누군가를 서포트해야 하고 더불어 각자의 사수에게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잘 보여야 된다는 사회 초년생의 강박감. 우리는 그 속에서 고민하고, 그 고민에 대해 열중하는 시기를 보냈다. 그랬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의 질이 깊고 짙다. 특히 하루 끝에 그래도 잠시나마 온전한 내가 되어 내려놓을 수 있는, 퇴근하고 마시는 간단한 (사실 간단한 적은 없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우리를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방황하고 고민할 수 있게 했다. 그러한 고민 끝에 드디어 MD 직무를 달고 각자가 정말 펼쳐 보이고 싶은 역량을 발휘할 때 누구보다 서로 내 일처럼 축하해줬다.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지금은 각자의 회사에서, 혹은 삶에서 담당하는 위치에 맞게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단톡방에서는 당시에 느꼈던 설움으로 발끈하다가도,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가끔은 억울하기도 하고 괜히 자존심에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처음으로 직업인으로서 냉혹한 사회에 입장 했을 때 거짓말처럼 이 구성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 건 행운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미숙했던 초년생을 지나 본질은 동일하나 좀 더 성숙해진 어른이 되어 서로를 잘 이해하는 관계로 순항 중이다.




어제도 연수는 나에게 대뜸 전화해선 진로 고민을 토로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 또한 앓고 있는 고민이라 공감해 주었다. 통화는 끝으로 해쭈의 “화이팅 하자~!”로 우리답게 끝났다. 이렇게 어제도 각자의 오피스 걸프렌드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