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에게 쓰는 글
지난 주말, 임신 막달이 되어 가는 영현이와 1월 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우리를 만나러 전주에 갔다. 우리 셋은 대학 학보사에서 만난 인연으로, 지금까지 1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마치 대학 때처럼 노래방을 다녀온 얼굴을 하고 있어서 편안하고 익숙했다. 반면, 영현이는 얼굴은 여전히 내가 잘 아는 모습이지만, 불러온 배가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첫인상과 현재 인상이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영현이는 내가 그녀에게 처음 느꼈던 ‘알파걸’ 그 자체로 살아오고 있다. 우리 또래보다 남을 배려하는 깊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한 차원 달랐다. 특히 삼남매 중 장녀인 영현이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막내동생 경수를 종종 신문사에 데려오곤 했는데, 대학생 누나를 따라와 하는 일이란 게 초고를 작성하는 누나 옆에서 숙제하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을 보고 영현이가 가정에서 얼마나 의젓한지 알 수 있었다. 나도 남동생이 있는 입장에서, 그것도 초등학생 남동생이 누나를 잘 따르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나이 차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또래 친구들과 놀 시간에 누나를 따라와 숙제를 하다니.
영현이가 한 차원 다르다고 느꼈던 또 다른 이유는 운전 때문이었다. 나도 수능이 끝난 후 운전면허를 땄지만, 정작 운전을 해야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는데, 영현이는 운전을 하며 학교를 오갔다. ‘운전이 뭐 대단한 일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친구가 몸집이 큰 차를 자유자재로 몰고 어디든 다녀오는 모습은 영현이를 ‘슈퍼 알파걸’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또 하나는 학보사에서의 활동이었다. 간호학과였던 영현이가 신문사 활동까지 병행하는 건, 실기가 많았던 내 전공보다도 더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전공 과목과 실습이 빡빡한데도, 단과대학이 신문사 건물에서 멀었는데도, 자전거를 타고 신문사로 출근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감히 투덜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결과물이 아쉬웠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문화부 기자였던 영현이의 글은 담백했고, 글을 쓰는 태도는 늘 성실했다. 다른 기자들의 글을 검토할 때도 나태하지 않았고, 오히려 본인 글보다 더 고민하며 꼼꼼하게 봐줬던 것 같다.
영현이를 향한 경외심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으니 여기서 잠시 접어두고, 현재의 영현이로 돌아가 보겠다. 그녀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지금은 전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양호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다. 단순히 학생들의 건강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담당한 교과와 교육에 대해서도 늘 깊이 고민하며 진심을 다한다. 하루하루 업무량을 겨우 채우는 나와는 다른 직업관을 가진 친구. 역시 알파걸이다.
최근에는 만삭의 몸으로 요양보호사 자격까지 취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친구의 한계는 대체 어디일까?’ 싶었다. 너무 궁금하고 자극이 된다. 진짜 갓생을 입이 아닌 몸으로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 그렇다고 으스대는 것도 아니고, 매번 겸손한 태도로 일관한다. 어쩌면 이런 달란트를 그녀에게 주었을까.
영현이는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지만, 때론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 진심으로 고민해 주고 나를 구렁텅이에서 건져주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히 적을 순 없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녀가 내민 손은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무너질 대로 무너졌던 나를 붙잡아 주었고,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영현이가 듣기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녀가 소생시켜준 내 인생을, 적어도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친구는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다. 나는 정말 영현이의 영원한 ‘끼리끼리’ 친구가 되고 싶다. 영현이는 오히려 나에게 자극을 받는다며 내가 최고라고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녀의 인간성을 완성하는 태도다. 이런 멋진 친구가 낯설 만큼 신기하다. 추웠던 봄날, 신문사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이 감사하다. 정말 잘난 사람은 질투조차 나지 않고, 그저 신기하다고 하던데, 나에게 영현이가 그런 존재다.
곧 출산을 앞둔 영현이를 만났다. 우리 셋 중 취직도, 결혼도 가장 먼저 했던 알파걸 영현이가 이제는 가장 먼저 엄마가 될 차례였다. 아이를 기다리는 그녀의 얼굴이 내가 지금껏 봐왔던 모습 중 가장 설레 보였다. 나도 복보의 태동을 느끼며 함께 그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영현이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기도를 하게 됐다. 항상 아낌없이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는 영현이에게, 이제는 그녀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진심으로 축하하고, 행복하길 바랄게. 영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