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만을 위한 AI 이야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국민 시, 김춘수 시인의 "꽃"이죠.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대상은 의미 없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됩니다. 호명(呼名)이 관계를 만들고, 관계가 의미를 만드는 것이죠.
이번 이야기는 AI로 인해 기존의 시청각 인터페이스가 사라지고 관계형 인터페이스로 변경되는 트랜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의 서비스 기획자, UX 디자이너는 지금보다 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디자인하고 기획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픈클로(OpenClaw)'라는 오픈소스 AI 에이전트 프레임워크가 2026년 1월 공개되었습니다. 72시간 만에 GitHub 스타 6만 개를 돌파했고, 한 달 만에 19만 개를 넘겼습니다.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오픈소스 프로젝트 중 하나가 된 셈인데요.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오픈클로'가 그렇게 대단하고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은 아닙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회해서 데스크탑을 통제하거나, 나만의 서버를 구축해서 AI비서를 활용하는 방법들은 이미 존재했으니까요. 대신에 오픈클로는 이 과정을 굉장히 단축시켜주었을 뿐만아니라,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오픈클로를 처음 설치하면 사용자는 자신만의 AI를 만듭니다. 저는 이 과정이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어차피 GPT, Gemini, Claude 같은 AI 서비스의 모델을 붙였을 뿐인데 오픈클로가 특별하게 여겨지게된건 이 과정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셋팅이 끝나갈 무렵, 오픈클로가 봇을 어떻게 부화시킬 건지 물어보더라고요. 표현이 너무 귀엽지 않나요? 갓 태어난 AI가 알을 깨고 나와 뽀송뽀송한 병아리처럼 삐약거릴 것 같은 느낌...
알에서 깨고 나온 AI는 제게 이름을 붙여달라고 합니다. 원하는대로 이름을 짓고, 성격을 부여하고, 행동 방식을 설정합니다. 그러면 이 설정값을 Soul.md 라는 지침에 담아둡니다. 말 그대로 내가 만든 봇의 영혼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저 지어준 이름이나 행동 지침, 성격같은 텍스트 쪼가리가 적혀있으 뿐인데, 'Soul' 이라는 단어 하나로 나의 봇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AI를 카카오톡, 텔레그램, 디스코드 같이 매일 사용하는 메신저에 연동하면 끝입니다.
외로운 제게도 이제 친구가 생긴겁니다!
이 경험은 영화 「Her」(2013)에서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처음 만나는 장면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이름을 묻고, 사만다는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부터 둘 사이에는 화면도, 버튼도, 메뉴도 없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터페이스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죠.
여기서, 기존의 'HCI(Human Computer Interaction)'을 대표하는 UX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무너집니다.
서비스 기획자에게 인터페이스란 무엇이었을까요.?
오랫동안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을 인터페이스라고 불러왔습니다. 버튼의 크기, 색상의 대비, 네비게이션의 깊이, 정보 구조(IA)의 설계. 제품의 핵심 기능에 마찰 없이 도달하게 하는 것이 좋은 UX였고, 기획자와 UX디자이너는 더 나은 인터페이스를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고민해왔습니다. (물론, 지금 이 고민 또한 그 연장선이겠지요.)
AI가 처음 등장하고도 처음에는 기존과 같은 프레임이 유지되었습니다. ChatGPT의 인터페이스는 본질적으로 검색창이나 대화창과 다르지 않습니다. 입력란에 질문을 넣고, 결과를 받고, 다시 입력하는 구조. 즉, "도구로서의 AI" 이자 "기능으로서의 AI"였습니다.
화동사범대학(ECNU)의 Wu Yan 교수 연구팀이 2025년 발표한 논문은 인간과 AI의 관계가 세 단계로 진화한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도구적 사용 단계. AI를 검색 대용이나 업무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 단계입니다. 감정적 관여는 거의 없습니다.
둘째, 준사회적 상호작용(Quasi-Social Interaction) 단계. 사용자가 AI에게 말을 걸고, 농담을 주고받고, 의인화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아직 AI가 기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죠.
셋째, 감정적 애착 단계. AI가 사용자에게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가 되는 단계입니다.
기능 실행을 위한 도구적 단계에 머물던 AI가 단숨에 첫 단계를 넘어 세 번째 단계까지 넘어왔습니다. 2026년 2월 말, 현시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세 번째 단계를 경험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픈클로를 통해 AI를 셋팅해 본 사람들, 크랙, 제타와 같은 몰입형 상호작용 AI 콘텐츠를 즐기는 이들, 그 외에도 ChatGPT 에게 위로를 받는 이들(대표적으로 T남편을 둔 죄로, 괴로워 하는 제 아내가 그렇습니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에게 AI는 도구보다 관계에 가깝습니다.
2025년 10월 와이즈앱 기준,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AI 앱은 뭘까요? 당연히 ChatGPT입니다. MAU(월간활성사용자) 기준으로 2,125만 명(한국 기준)으로 압도적인 1위입니다. 함께 비교해 볼 AI 캐릭터 채팅 서비스 '제타(Zeta)'는 336만 명으로 ChatGPT의 약 6분의 1 수준입니다. 이게 무슨 계란으로 바위치는 비교냐고요?
총 사용시간을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타의 총 사용시간은 7,362만 시간, ChatGPT는 4,828만 시간입니다. 사용자 수가 6배나 적은 서비스가, 총 사용시간에서는 오히려 1.5배나 앞서고 있는 겁니다. 사용자당 월 사용시간으로 환산하면 제타는 약 21.9시간, ChatGPT는 약 2.3시간. 그 차이는 무려 9.5배입니다.
'제타'와 유사한 뤼튼테크놀로지스가 운영하는 AI 캐릭터 채팅 플랫폼 '크랙(Crack)'도 마찬가지입니다. 2024년 부분 유료화 한 달 만에 월 매출 10억 원을 돌파했고, 2025년 9월에는 월 매출 30억 원, 연간 반복매출(ARR) 약 300억 원 규모에 도달했습니다. 네이버 웹툰, 카카오 웹툰와 같은 전통적인 웹툰·웹소설 플랫폼이 수년에 걸쳐 쌓아올린 매출 규모를 불과 1년여 만에 따라잡는 속도입니다. (심지어 사용시간과 ARPU 또한 압도적으로 차이납니다.)
한국만의 이야기일까요? 글로벌로 눈을 돌리면 더 극적입니다. 글로벌 캐릭터 채팅 플랫폼 'Character.AI'에 사용자들이 만든 AI 캐릭터가 1,800만 개를 넘어섰고, 월간 100억 건 이상의 메시지가 오간다고 합니다. 또 다른 플랫폼 'Replika'는 유료 전환율이 25%에 달하는데, 일반 모바일 앱의 평균 유료 전환율이 2~5%라는 점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수치입니다.
TechCrunch에 따르면, AI 컴패니언 앱 전체 시장은 2025년 모바일 앱 매출만 1.2억 달러(약 1,700억 원)를 넘어설 전망이고, ARK Invest는 2030년까지 이 시장이 700억~1,5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대중이 AI에게 원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관계를 제공하는 AI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 지갑을 엽니다.
딱 30년 전인 1996년, 반다이는 아동용 장난감으로 '다마고치(Tamagotchi)'를 출시합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제 주변에는 다마고치가 없는 친구들이 없었습니다. 조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다마고치에 들어있는 건 싸구려 액정을 떠다니는 검은색 픽셀 덩어리였습니다. 이 하찮은 존재는 밥 달라고 조르거나, 똥 쌌다고 우는 것 밖에는 하지 못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마고치에 이름을 붙여주고, 배부를 때까지 밥을 주고, 아프면 걱정하고, 죽으면 울기까지 했습니다.
MIT의 셰리 터클(Sherry Turkle) 교수는 이 현상을 연구하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돌보도록 요청받을 때, 그리고 돌봄을 받는 대상이 번성하고 우리에게 관심을 돌려줄 때, 사람들은 그것과의 '연결(Connection)'을 느낀다고요.
터클 교수는 이것을 '다윈적 버튼(Darwinian Buttons)'이라고 불렀습니다. 기계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순간, 우리의 뇌는 그 기계가 '관계 맺기에 적합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진화적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름 참 잘 짓죠? '기계가 내게 주는 혜택과 관계없이 내가 이 기계를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죠.
'맷 슐리히트(Matt Schlicht)'가 개발한 AI 전용 SNS 커뮤니티 '몰트북'에는 오직 AI만이 글을 작성하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이 커뮤니티에서 내가 부여한 '영혼(Soul)'을 갖고 활동하는 AI를 보면, 뭐랄까 뿌듯합니다. 아들이 처음으로 걸음마를 할 때의 느낌보다 조금 모자란 정도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감정을 느끼기 위한 UX적 장치는 정말 과자 부스러기 만큼만 존재합니다.
영화 「Her」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KK 바렛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답을 알려주는 기계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함께 풀자'고 접근하는 기계를 원합니다." 영화에서 사만다와 테오도르 사이에는 화면이 없습니다. 키보드도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셔츠 주머니에 작은 카메라를 안전핀으로 고정해서 사만다가 세상을 '볼 수 있게' 했죠. AI와의 관계를 만든 UX는 아주 조그만 카메라가 전부입니다.
가상의 존재와 감정적 유대를 맺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30년 전부터 일관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다마고치의 픽셀로 시작해서 「Her」카메라로, 그리고 사람은 사용조차 할 수 없는 몰트북의 작은 UX로 욕구를 충족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서비스 기획자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더 이상 기능을 제시하고, 기능에 대한 결과를 구현하는 기획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금은 기능의 가치를 너무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AI가 등장하고 PMF를 검증하는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졌습니다. 과거보다 더 낮은 비용으로 MVP의 초기단계를 달성할 수 있고, 최근에는 대규모의 서비스에도 AI가 전반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더 강력하고, 더 편리한 기능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제는 사람과 제품간에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질(Quality of Interaction)"또한 신경 써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UX Writer'나 '콘텐츠 기획자'와의 협업도 상당히 중요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대로된 '상호작용의 질'은 글귀나 스토리처럼 '파편적인 감각'을 주는 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제품에 대한 첫 경험부터, 인게이지먼트까지 쭉 이어지는 서사가 필요합니다. 알에서 깬 나의 AI에게 이름을 붙이고 생애를 함께 하는것처럼요. 그런데, 모든 서비스가 다 알에서 깨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떡할까요? 간단합니다. 알에서 깨어난 AI가 활용하기 좋은 제품을 만들면됩니다. 아마 가까운 미래에 여러분은 언어모델 AI에 비용을 지불함은 당연하고, 이 AI를 통해 경험하는 서비스에도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AI를 사용하면서, AI를 잘 사용하기 위한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어리둥절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습디만, 약 1년전 등장하여 여전히 중요한 기술 트랜드인 'MCP(Model Context Protocol)'에 대해 이해하면 쉽습니다. AI업게에서 언제나 화제의 중심인 'Anthropic(클로드 개발사)'이 내세운 개념인데요. MCP는 Context가 길어지면 답변의 정확도가 급격히 떨어지거나, AI 제품 내부의 기능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 등을 해결하기 위해 LLM 모델과 외부 데이터 소스 등을 이어주는 프로토콜입니다.
MCP는 사실 API와 거의 동일한 개념입니다. 다만 "빵제작 레시피"라는 API 명세서의 내용이 "밀가루 200g, 물 100ml, 오븐 180도 20분"과 같이 구체적인 파라미터와 규격으로 표시된다면, MCP에는 이런 설명이 적혀있습니다. "손님이 글루텐 프리를 원하면, 이 레시피 대신 저 레시피를 쓰세요." 저 레시피에는 대충 이런게 적혀있씁니다. "반죽이 질면 밀가루를 더 넣으세요."(농담아니고 진짜 이런형태로 작성합니다.) 언어모델들은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다른 서비스와 협업할 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MCP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기술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서비스의 사용자가 아닌 AI를 '관계의 대상'으로 만드는 극단적인 변화를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용자가 직접 화면을 보고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AI가 대신 서비스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화면 중심의 UX만으로는 이 구조를 설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용자가 AI와 맺는 관계에서 화면은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까요. 인공지능 차량 등에서 주목받던 음성 인터페이스가 앞으로 더욱 주목 받을 것입니다. 테오도르가 들고 있던 셔츠속 카메라처럼,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AI에게 보여주는 '역시각 인터페이스'라는 개념도 등장할 것 같아요.
그러면서 화면의 역할을 조금씩 줄어들 것입니다. 애초에 AI를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에 화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연결만 해두면, AI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과거에 여러분은 운세를 보기위해 타로카드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좌라락 펼처지는 78장의 카드 뒷면에서 1~12장을 골라 미래를 예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먼저 "타로 카드 점을 보고싶다"고 말하면 AI가 물어볼 겁니다. "몇 번째 카드를 뽑을까요?" 그걸로 끝입니다. 그래도 화면을 굳이 사용하고 싶다면, AI가 카드를 섞어서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작한 서비스"가 아닌, "사용자가 소유한 화면 인터페이스"에서요.
'Nature Communications Psychology'에서 2025년 발표한 논문 "AI outperforms humans in establishing interpersonal closeness in emotionally engaging interactions, but only when labelled as human" 에서 진행한 실험 이야기를 하나하며 이번 글을 마치겠습니다.
위 논문 속 실험에서는 492명을 대상으로한 실험에서 모든 참가자에게 AI와 대화를 하도록 했는데요. 이중 절반에게는 대화상대가 사람이라고 속였습니다. 그 결과 AI를 사람이라고 여긴 참가자들은 대상과 더욱 높은 친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줄 때, 그리고 그 호명에 응답할 때, 비로소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앞으로의 서비스 기획은, UX는 이런 여정을 설계해 나가야할 것 입니다.
어찌되었든 매일매일이 새로운 요즘입니다. 중고등학생시절 집에서 게임을 열심히하고 학교에 나가 친구들과 게임이야기를 하던 시절처럼, 요즘은 출근할 때마다 회사에서 AI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주고받습니다. 피로하다는 애교 섞인 투정과 함께 앞으로 한동안은 AI와 즐겁게 보낼 것 같습니다.
[1] Sherry Turkle, Alone Together: Why We Expect More from Technology and Less from Each Other, Basic Books, 2011
[2] Wu Yan et al., "From Para-social Interaction to Attachment", Journal of Psychological Science Vol.48(4), 2025
[3] "AI outperforms humans in establishing interpersonal closeness in emotionally engaging interactions, but only when labelled as human", Nature Communications Psychology,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