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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Mar 03. 2021

책환자들을 위한 다정한 위로이자 격려의 책

어슐러 K. 르 귄,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좋은 서평이란 그 책을 사러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르 귄은 최고의 서평가이다. 그의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읽노라니 이 책에 언급된 모든 작품들을 읽고 싶어진다. 르 귄이 찬사를 쏟은 책은 물론이요, 조금  비판한 책은 또 그 나름대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읽어보고 싶어진다. 책을 읽는 내내 르 귄이 언급한 작품마다 온라인으로 찾아보고는 장바구니에 담기 급급해진다. 이미 읽은 책이더라도 르 귄이 지적한 부분을 다시 한번 음미하면서 읽어보고 싶어지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급하게 읽고 싶어진다.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는 책 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그리하여 결국은 삶에 관한 르 귄의 오랜 사유의 결과가 담긴 최고의 에세이다. 


르 귄은 서평을 일컬어 흥미롭고 부담스러운 글이라고 말한다. 그 자신은 싫은 책을 다룰 때만 아니라면 서평 쓰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르 귄이 생각하기에도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이 서평으로서는 최고이지만, 그는 잘 쓰고 잘 맞는 악평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악평을 쓰는 즐거움은 저자에 대한 동료 의식과 함께 고통을 가하는 것을 즐긴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 등 온갖 죄책감 탓에 우울해진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실린 서평들은 대부분이 호평이다. 그중에서도 주제 사라마구를 향한 애정 넘치는 글은 단연 인상적이다. 나는 사라마구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았다.《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그 작품은 처음부터 읽기 수월하지는 않았다. 독특한 문체도 그렇지만 그 끔찍한 상황이 주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책장을 쉬이 넘기지 못하게 했다. 르 귄도《눈먼 자들의 도시》로 처음 사라마구를 접했을 때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 책을 더 읽지 못하고 일단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르 귄은 사라마구에게 완전히 반한다. 


르 귄은 사라마구를 일컬어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 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주는 유일한 소설가’라고 말하며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라마구는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서 대단히 희귀한 뭔가를 전달’하며 ‘환상을 깨뜨리면서도 애정과 경탄을 허용하고 맑은 시선으로 용서’한다. 르 귄이 보기에 사라마구는 ‘그 정신과 유머 면에서 최초의 위대한 유럽 소설가 세르반테스와 가장 가까운 작가’인지도 모른다. 《수도원의 비망록》,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 《동굴》, 《코끼리 여행》 등등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사라마구의 모든 작품이 읽고 싶어진다. 특히 르 귄은《코끼리 여행》을 일컬어 ‘사라마구의 가장 완벽한 예술 작품’일 것이라고 극찬한다. ‘모차르트의 아리아나 민요처럼 순수하고 진실하며 불멸할 작품’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사라마구는 심금을 울리는 품위와 재치를 담아, 그리고 자기 작품을 완전히 제어하는 위대한 예술가답게 단순하게 글을 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원로이며 눈물이 있는 남자. 지혜로운 남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287쪽)라는 매력적인 글귀를 읽노라면 누구인들 주제 사라마구를 읽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마거릿 애트우드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밝히는 글들도 흥미롭다. 이 책에서 르 귄은 사라마구만큼이나 애트우드의 작품을 여러 번 말한다.《도덕적 혼란》을 언급할 때는 ‘이 책은 하나의 건축물이고, 하나의 인생담이긴 하지만 삽화적’이라 말하며 ‘이 모든 단편의 공통점은 투명한 시선과 훌륭한 지력, 그리고 완벽한 나머지 번쩍일 때를 제외하면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언어 구사력’을 극찬한다.《도덕적 혼란》의 첫 번째 단편인 <나쁜 소식>을 평할 때 르 귄은 ‘이보다 더 날카롭고, 건조하고, 웃기면서 슬플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급기야 ‘이렇게 부드러우면서 그럴듯하게 판타지로 넘어가면서 현실을 심화시키는 수법이야말로 애트우드의 가장 음흉하고도 다정한 면모’라며 ‘정말이지, 애트우드 같은 작가는 없다’(338쪽)고 말하기에 이른다. 《홍수의 해》에 대해서 그 결말은 놀라움이자 수수께끼라고 말하면서 “여러분이 이 비범한 소설을 읽고 직접 판단해야 마땅하다.”고 하며, 애트우드의 또 다른 단편집《돌 매트리스》의 서평에서는 ‘유연하고 적응력 높고 매우 지적이며 대단히 고집스러운 재능 탓에 기존의 리얼리즘으로부터 멀리 배회’하는 능력을 지닌 애트우드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보는 일은 변함없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애트우드의《홍수의 해》이 시리즈도 사놓고 아직 읽지 않았는데,  서둘러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매력적인 서평이 너무나 많아 일일이 소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스투르가츠키 형제의 《노변의 피크닉》에 관한 르 귄의 글은 소개하고 싶다. 르 귄은 이 작품을 일컬어 ‘인간관계들은 진실성을 띤다. 엄청나게 뛰어난 지식인 같은 건 없다. 다들 평범한 사람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대단찮고 모멸스러운 삶을 살아가며 그 모습은 감상주의도 냉소도 없이 그려진다. 인간애를 치켜세우지도 않지만,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게 얼마나 연약한지 알기에 저자들의 필치는 부드럽다’고 말한다. 이탈로 칼비노의《완전판 우주만화》(우리나라에서는《우주만화》, 《모든 우주만화》로 번역)를 평하는 글도 아름답다. “여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독서는 드러누워서 푹 빠져들 길고 두툼한 멋진 장편 소설 한 권, 아니면 여름 과일 바구니처럼 한 번에 한두 개씩 빼먹으며 온전히 음미하기 좋은 훌륭한 단편 잔뜩이다. 이탈로 칼비노가 보낸 큼지막한 이야기 바구니가 있다. 복숭아, 살구 천도복숭아, 무화과, 다 있다. 그것이《우주만화》의 개요이다.”(369쪽). 서평을 이렇게 쓸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당장 이탈로 칼비노의 책이 읽고 싶어진다. 


마거릿 드래블의 작품을 언급하면서 그녀는 “근본적으로 솔직하지만 즐겁도록 절묘하기도 한 강렬한 서사 추진력, 선명하지만 대부분 말로 하지 않는 도덕적 부담, 사회와 젠더와 예절과 유행에 대한 적확하고도 즐거운 관찰, 어쩌면 성격이 곧 운명인지도 모를 강렬한 개성을 갖춘 등장인물들. 세상에, 내가 지금 제인 오스틴에 대해 말하고 있나?”(377쪽)라고 하는데, 나는 르 귄이 언급한《바다숙녀》를 읽지는 않았지만 드래블의《찬란한 길》에서 르 귄이 말한 지점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기에 그저 그 빼어난 표현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최근 국내 출간된 살만 루슈디의 《2년 8개월 28일의 밤》에 대해서 르 귄은 “플롯을 요약할 생각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소파에 기절해 쓰러질 판이다. 루슈디의 상상력은 프랙털 구조다. 끝없이 플롯이 플롯을 싹 틔운다. 적어도 101개의 이야기와 하부-이야기가 있으며 그만큼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여러분은 이것만 알면 된다. 그 이야기들 대부분이 아주 재미있고 즐거우며 오묘”하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용기에 감탄하고, 그 끝내주는 색채와 활기와 유머와 찬란함을 즐기고 그 관대한 정신에 기쁨을 느낄지를 생각하고 싶다.”(473쪽) 말하니 이 책도 당장 장바구니행이다. 르 귄이 서평 쓰기 강좌를 연다면 첫 번째로 달려가서 배우고 싶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단연코 읽고 싶어지는 책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가 아닐까. SF 장르를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 이 분야 책을 많이 읽지 못했던 나로서는 르 귄이 극찬한 이 작품은 진심으로 이제야 알게 된 것을 통탄하면서 그 어떤 작품보다 먼저 읽고 싶어진다. 그런데 절판!! 게다가 중고 판매 가격이……. 아무튼 누가 이 책 좀 다시 내주세요!


이렇게 르 귄이 언급한 책에 관한 구절만 소개하니.《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는 단순히 서평 책인가 싶은데, 첫 번째 장은 읽기와 쓰기, 문학, 특히 SF장르에 관한 르 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많다. 무엇보다 르 귄은 “문학의 성차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문학에서 여성들이 쓴 책은 줄곧 차별당하거나 소외당하며, “중요한” 문학상은 더 적게 받고 작가가 죽고 나면 부주의하게 다뤄지는 일이 더 많다. 르 귄은 “여성의 글”에 대해서는 들어도 “남성의 글”에 대해 듣지 못하는 상황, 즉 남성의 글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한 균형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흔히 쓰면서 자연히 따라와야 마땅할 반대말인 ‘매스큘리니즘’은 아예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동일한 특권과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 작가의 글은 보통 ‘폄하’, ‘누락’, ‘예외화’ 등의 교묘한 방법으로 잊히거나 묻힌다. 예컨대 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 잦다. 정상은 남성이다. 여성은 정상의 예외, 정상에서 배제된 존재인 것이다. 르 귄이 보기에 어떤 여성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많은 존경을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르 귄이 생각하기에 작가 생존기에 일어나는 이러한 폄하, 누락, 예외화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르 귄의 이러한 지적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는 책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책 읽기를 멈추지 못하는 책 환자들을 위한 다정한 위로이자 격려의 책이다. 르 귄은 문학은 아직 놀랍게도 ‘비교적 정직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말하며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매뉴얼,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27쪽)라고 말한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정신과 교감하고, “상상력의 현장에 함께”한다. 르 귄이 생각하기에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인 즐거움과 자신들의 즐거움을 다르게 인식한다. 독서는 능동적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행동이고 내내 깨어 있어야 한다. 스스로 말하지 않기에 책은 도전이 된다. 책은 머릿속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단편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게임처럼 규칙이나 선택지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때문에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색다른 즐거움을 아는 이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해 오늘도 승냥이처럼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고, 남들은 무슨 책을 읽나 살펴보고, 어떤 이들에게는 책보다도 더 재미없을 남들이 남긴 리뷰까지 읽어가며 책을 쓸어 담고 있는 이들, 그런 책 환자들은 계속 책을 읽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즐거움임을 알기에. 그래서 르 귄의 다음과 같은 말은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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