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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문고 Oct 17. 2024

낯선 이를 추억하며

 수술을 위해 입원했을 때, 병실에는 나보다 먼저 입원한 일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있었다.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가 결국 재발, 전이되어 입원한 이 할머니는 늘 먹고 싶은 게 많았다. 할머니의 남편은 불평 없이 아내가 먹고 싶다는 걸 구해오곤 했다. 그 덕에 나도 오렌지, 단팥빵, 수제 과자 같은 간식거리들을 종종 얻어먹었다.


 그 시기의 나는 난소에 있는 종양이 떼어 내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종양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기를, 암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 수 있기를 바랐다.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혼자 있고 싶었던 나는 병상에 커튼을 치고는 되도록 침대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할머니는 엄마를 통해 내게 간식거리들을 전했다. 가끔 답답해 커튼을 열면, 누워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감사합니다. 같은 상투적인 말을 하곤 했지만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이 할머니는 자주 지쳐 누워 있었고, 나는 나를 커튼 뒤에 가둬두곤 했으니까.


 이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사 온 음식의 절반도 채 먹지 못했다.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억지로 먹으면 다 게워내곤 했다. 할아버지는 괜찮다. 괜찮다. 하며 아내가 게워낸 음식을 치웠다. 그리곤 다시 먹고 싶다고 한 음식을 구해왔다. 한 번은 커튼 너머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옛날에 남포동 복국집. 그 집 복국이 먹고 싶네.”

 “거기 자주 갔었지. 그때 우리 한창 재미났는데.”


 두 사람은 자식을 어느 정도 키워 놓고 친구들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생을 즐겼던 40대를 함께 추억하고 있었다. 함께 간 장소,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 두 사람은 추억할 게 많았다. 하나뿐일 딸이 캐나다로 이민 간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더 가까워졌다고 했다. 딸을 그리워하는 대신 두 사람이 더 '재미나게' 살았다고.

 

 “인생 참 좋았네.”


 이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없었다.

 자기 전, 이 할머니가 수건을 꺼내기 위해 캐비닛을 열었다. 나는 우연찮게 캐비닛에 든 할머니의 옷을 봤다. 입원할 때 입고 온 옷이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쨍한 코발트블루 빛깔의 바지 정장 세트였다. 연푸른색의 환자복을 벗고 새파란 정장을 입고 밖으로 나가는 이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짧고 흰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할아버지와 손을 잡았겠지. 그렇게 다시 인생을 즐기러 가겠지. 남포동 복국집이든, 중앙동 중국집이든 어디든.


 수술이 끝나고 다시 병실로 돌아갔을 때, 이 할머니는 나를 보고 자기가 처음 수술받았던 날이 떠오른다며 눈물을 보였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병실에서 보냈다. 종양의 정체는 암이었고, 나는 결국 항암치료를 받게 됐다. 그전까지 집에서 회복하기로 했다. 퇴원하던 날, 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제 다시는 여기 오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고, 엄마는 어차피 다시 항암치료하러 올 건데요 뭐. 하며 또 만날 날을 기약했다. 의외의 일이지만, 엄마는 이 할머니 부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저 할머니는 살겠다. 먹고 싶은 게 저렇게 많으니 살지 못 사나.”


 엄마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먹고 싶은 게 많으니 반드시 살겠지. 

 일주일 후, 항암치료를 위해 다시 병실을 찾았다. 하지만 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엔 낯선 할머니가 나처럼 항암치료를 기다리며 수액을 맞고 있었다. 조금은 실망한 채 나도 수액을 맞으며 가만히 천장만 쳐다봤다. 엄마도 약간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퇴원했겠지. 그 코발트빛 정장을 입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병실은 금세 가득 찼다. 횟수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항암치료를 받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치료받은 환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알고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커튼을 쳤다.  

 

 “여기 계속 입원해 있던 이 할머니 알제?”

 “알지. 이번엔 안 보이네.”

 “며칠 전에 병원에서 죽었다드라. 갑자기 안 좋아져가.”


 누군가는 찝찝하다며 뭐 하러 그런 말을 하냐고 했고, 누군가는 암이 그렇게 무서운 병이라고 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할머니는 한 번도 자기 몫의 식사를 다 먹은 적이 없었으니까. 


 내 바로 맞은편 침대가 이 할머니의 침대였다. 다른 할머니가 누워 있는 곳. 찝찝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가볍게 병원을 떠난 것뿐이니까. 내가 가져온 간식은 결국 나눠 먹지 못했다. 웃으며 인사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커튼 뒤에 숨어 조용히 명복을 빌 수는 있었다. 


 부디 그 푸른 정장을 입고 떠났기를. 인생의 마지막, 병원에서 보내는 순간 누군가는 그녀의 그 시간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기를.  나는 긴 대화도 나눈 적 없는 누군가를 위해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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