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이들의 개학날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 쯤 이 시간이 언제 끝나려나 싶었는데, 벌써 끝났다. 물놀이 한 번 제대로 다녀오지 못하고, 여행다운 여행도 한 번 못했는데 여름 방학이 끝나버렸다. 방학이 짧은 건지 세월이 빠른건지 모르겠지만, 방학이 끝나서 기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불가마에 들어간 듯 찌는 날씨였는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오늘 아침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직 매미 소리는 들리지만, 매미도 힘이 다한 듯 한 여름 기세에 못 미치는 울음소리다. 습관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타서 마시는데 입술에 닿는 감촉이 시원한게 아니라 시린 느낌이다. 이제 곧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갈아타야 할 것 같다.
온 식구가 북적이던 집에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선풍기가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에어컨을 켜고도 덥다는 아이들과 남편이 사라진 집은 선풍기조차 틀 필요가 없다. 열려진 양쪽 문으로 맞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있다.
나는 이 여름 동안 뭘 했을까?
수박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미숫가루를 타서 식구들 입에 넣고, 복날이라 삼계탕을 끓이고, 매일 뜨거운 불 앞에서 식구들의 끼니를 만들었다. 높아진 물가에 손을 달달 떨며 장을 보고, 땀을 흘리며 들고 와 씻고 다듬었다. 까슬까슬한 침구를 깔고, 얇은 여름 이불을 수시로 빨아 널었다.
소소한 일들을 쉼없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눈에 띄는 건 없다. 실체없는 그림자 같이 이 여름을 보낸 것 같다.
그림자의 삶. 전업주부로 사는 내 모습이다. 나도 뜨거운 태양처럼 존재감을 뿜어내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솟아오르기도 하지만, 그림자로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나다. 한여름 내리쬐는 태양 옆에서 만나는 진한 그늘 덕분에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아주겠지.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도 아직 나는 한여름의 그림자다. 여름의 그림자는 꿀같은 시원함을 안겨준다. 여름엔 모두들 그늘을 찾는다. 나도 아직은 우리 집에서 누구나 찾는 존재라 생각한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 덕분에 나의 그림자 역할은 존재감이 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무렵 나는 가을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가을의 그림자는 서늘해서 기분이 좋을때도 있고, 가끔은 추워서 피하게도 된다. 선명한 가을은 햇살도 좋고 그늘도 좋다. 가을의 그늘을 일부러 찾아 다니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가을 그늘을 찾기도 한다. 내 인생의 가을이 왔을 때 누군가 나를 찾아 주면 감사하고, 찾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아야 한다. 다짐은 이렇게 야무지게 하지만, 아무도 찾아주지 않으면 누구보다 서운해 할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이가 더 들고 몸이 내 말을 안 들을 때쯤 나는 겨울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찾기는 커녕 피하기 바쁜 겨울의 그늘이다. 자외선이 얼굴에 주름과 기미를 만들더라도 그늘은 어떻게든 피하고 햇살에 몸이 닿고 싶은 겨울이다.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겨울의 그림자같은 날도 결국은 오고 말 것이다. 그런 날이 올 거라 생각하면 조금은 쓸쓸해진다. 계절이 바뀌고 나이가 드는 건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쓸쓸하다는 생각은 거두고 지금의 여름 그림자 역할을 즐겨야겠다.
오늘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얼음을 동동 띄운 시원한 오미자 에이드를 만들어줘야겠다.
아직은 계절도, 내 인생도 여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