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과서연구재단 〈교과서 연구〉 120호, 특별기획
“우순소리(윤치호), 금수회의록(안국선), 중등교과 동국사략 상/하(현채), 유년필독석의 상/하(현채), 유년필독 권1/2(현채), 20세기 조선론(김대희), 월남망국사(리상익), 월남망국사(현채)
위 출판물은 치안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에 출판법 제16조를 근거로 모든 출판물의 발행과 판매 배포를 금지시킨다.”
- 〈내부 고시〉 제27호, 융희 3년 5월 5일 내부대신 박제순
1909년 5월 5일, 내부대신 박제순이 위 도서에 대해 발매 금지 조치를 취한 것을 시작으로 일제는 1941년 1월까지 총 342종을 금서화하고 수십만 권을 불살랐다.
1909년에 제정된 〈출판법〉에 따르면 문서나 도서를 출판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원고를 첨부하여 내부대신의 허가를 얻어야 하였다. 또한 이미 출판된 저작물도 사회 질서나 풍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은 발매나 반포를 금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당시 발매 금지와 압수 조처를 당한 도서는 각국 흥망사 및 독립사, 위인의 전기, 세계 정세 등을 주제로 한 단행본들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교과서’들이었다.
교과서.
나라를 빼앗았음에도, 민족의 몸과 마음을 유린하였음에도, 끝끝내 불살라 없애고자 했던.
일제는 두려웠을 것이다. 교과서가 있는 한, 조선은 다시 깨어난다. 일어나 나아간다. 그리하여 나라를 되찾아간다. 언젠가 그리 된다. 교과서가 있다면 말이다. 교과서는 그런 책이다.
“조선인의 교육 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은 조선인의 독특한 문화를 파괴하려는 까닭.
언어는 인류의 사상의 표현이며 사상은 생명의 표현이라. 그러므로 언어는 생명의 표현이라.”
- 1920. 4. 《동아일보》, ‘朝鮮人의 敎育 用語를 日本語로 强制함을 廢止하라’ 기사 중
이 기사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사회가 겪었던 언어 탄압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한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담는 핵심 요소다. 따라서 조선어의 말살은 단순한 교육 정책의 문제가 아닌, 민족 정체성 말살을 목표로 한 식민지 통치 전략의 일환이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조약을 기점으로 하는 공립 교육 기관의 교육 목적은 ‘일본 신민 양성’이었다. 이는 조선 총독부에 의해 네 차례 개정된 ‘조선 교육령’을 통해 알 수 있다.
1911년 제정된 제1차 조선 교육령은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각기 다른 교육 목표를 부여하며 차별적 구조를 제도화했다. 이후 1922년, 1938년, 1943년에 이르기까지 교육령이 개정될수록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강압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특히 1938년 제3차 교육령부터는 침략 전쟁의 본격화에 발맞추어 조선인의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교육 내용이 중심이 되었다.
《조선어독본》과 《국어독본》
조선총독부는 일본어를 ‘국어’라 칭하고, 수업 시수는 늘린 반면에 한국어는 ‘조선어’라 칭하여, 지방어로 격하시키고 국어로서의 지위를 빼앗았다. 또한, 보통학교의 학년별 주당 수업 시수를 10시간에서 점점 줄여 1940년대에는 조선어 수업을 폐지하였다.
《조선어독본》, 조선총독부, 1911~1943.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후 학부에서 편찬한 《보통학교 학도용 국어 독본》의 내용을 가감하여 《보통학교 학도용 조선어독본》으로 제작하였다. ‘조선어’와 ‘한문’ 두 교과를 합하여 편찬·발행한 첫 보통학교용 교과서로 ‘조선어’는 외국어 또는 지방어로 탈바꿈되었다.
조선어에 대한 탄압은 단지 수업 시수의 감소에 그치지 않았다. 조선어 교과서는 검열을 통해 민족적 표현이 삭제되거나 변형되었고, 조선어를 사용하는 교사와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도 강화되었다. 이는 조선인이 자신의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국어(일본어) 교과는 매주 9~12시간씩 배정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어 교수 요지에는, ‘어구, 문장의 의의와 용법을 익혀 발음과 어조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한다.’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교과서는 ‘황태자전하’, ‘천황폐하만세’ 등을 강조하고 있으며,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등 일본을 위해 일한다는 인식이 심어지도록 서술하고 있다.
교과서에 담긴 언어는 단순한 학습 대상이 아닌, 이데올로기의 도구였다. 교과서 속 문장과 예시는 학생들에게 일본의 지배를 자연스럽고 정당한 질서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내면화하도록 유도했다. 나아가 일본의 문화와 가치체계를 일상 속에서 습득하게 함으로써 조선인 학생들의 자아를 식민 권력에 종속시키려 했다.
또한 식민지 이데올로기 형성의 주요 수단으로 역사, 지리 교육이 활용되었다. 주로 일본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고, 식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를 가르침으로써 한국인의 민족성과 국민성을 왜곡하였다.
역사 교육에서는 조선의 역사를 ‘오랜 쇠퇴와 무능의 역사’로, 일본의 침략을 ‘은혜로운 합병’으로 묘사했다. 지리 교육 또한 조선의 자연 환경과 자원을 일본 본토의 보완재로 다루며, 조선의 경제적, 문화적 종속성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어린 세대는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비하하고, 식민 지배를 당연시하게 만드는 왜곡된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전 조선의 학교 교육의 교수 용어는 조선어로 한다.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교과목은 일체 교수를 금한다.”
- 1945. 9. 17. 아널드(Arnold) 미 군정장관, 〈일반 명령 제4호〉 중
이 명령은 일제가 무너진 폐허 속에서, 다시 한 번 조선어로 교육을 이어가도 된다는 선언이자, 우리 교육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수탈과 탄압의 세월 동안 침묵했던 조선어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다시 소리 내어 울려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억눌렸던 민족의 자긍심과 회복의지를 되살리는 강력한 신호탄이었다.
광복 직후 미군정청은 긴급 조치의 형태로 조선인 교육의 재개를 알렸다. 미군정청 학무국은 1946년 2월 ‘교수요목 제정위원회’를 조직하여 교수요목을 제정하였고, 이때부터 1954년 문교부령 제35호 〈각급학교 교육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 공포된 시기까지를 ‘교수요목기’라고 일컫는다.
‘교수요목기’는 우리나라 교육의 체계를 다시 세워나가는 과도기였으며, 이 시기에 마련된 교육 기틀은 훗날 대한민국 교육 제도의 토대가 되었다. 혼란과 공백의 시기였지만, 오히려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와 열정이 살아 숨 쉬던 시기이기도 하다. 전국의 교사와 교육자, 출판인들이 뜻을 모아 스스로 교과서를 쓰고, 교실을 열고, 수업을 시작했다. 이는 ‘배움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교육에 대한 민족의 강렬한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군정 초기에는 검인정 제도가 시행되지 않아 교과서가 자유 발행되었고, 이후 1946년 3월 미군정청 학무국이 문교부로 승격하면서 문교부 편수국에서 검인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 기본 학제를 현행과 같은 6.3.3.4제로 단일화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왜곡된 교육 체제를 걷어내고 우리 스스로의 교육 체계를 마련해 나간 이 시기, ‘교과서’는 단순한 학습 교재를 넘어, 민족 주체성의 회복을 담은 선언문과도 같았다. 새롭게 편찬된 교과서 한 권 한 권에는 식민의 굴레를 벗고자 했던 민족의 염원과, 후세에 대한 희망이 응축되어 있었다.
《한글 첫 걸음》 – 광복 이후 첫 교과서
일제 말기 7년간이나 말살되었던 국어교육을 급속히 회복하기 위하여 1945년 11월 편찬된 광복 이후 첫 교과서이자, 최초의 한글 입문 교과서이다. 일러두기인 '주의'에 “초등 국어 중·하 또는 중등 국어 상·하를 가르치기 전 국어 공부의 터전을 닦아주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편찬 의도를 밝혔다. 100만 권 이상 인쇄된 광복 후 첫 베스트셀러이다.
《한글 첫 걸음》, 조선어학회, 1945. 조선어학회에서 국어 교육을 위하여 1945년에 간행한 한글입문교본으로, 광복 이후 첫 교과서이다.
《한글 첫 걸음》은 단지 문자 교육의 시작점이 아니라, ‘우리 말과 글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전 국민적 약속의 시작이었다. 이 교과서에 담긴 '가갸거겨'의 자모는 단순한 소리의 조합이 아닌,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민족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행위 자체가 곧 독립 이후 ‘진정한 교육의 주권’을 되찾는 일이었기에, 이 교과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학습자와 교사 모두에게 감격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바둑이와 철수》 – 정부 수립 후 첫 교과서
정부 수립 이후 새로 편찬되어 사용된 첫 교과서이다. 문교부에서 편수사로 일하던 박창해의 창작품을 교과서로 엮은 것으로, 교과서 내용 전체를 하나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엮었다. 《한글 첫 걸음》이 자모 익히기에 중점을 둔 ‘자모법 교과서’였다면, 본서는 ‘문장법 교과서’로 편찬되었고, 최초로 컬러 삽화를 게재하였다.
《바둑이와 철수》, 문교부, 1948. 정부 수립 후 문교부에서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육을 위하여 편찬한 최초의 국정교과서이다. 당시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던 박창해가 집필했다.
《바둑이와 철수》는 단순한 언어 습득 교재를 넘어, 광복 이후 어린이 교육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된 이 교과서는, 아이들의 일상과 정서를 반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친근한 접근법을 제시함으로써 전쟁과 분단으로 얼룩진 시대에도 아이들에게 웃음과 꿈을 심어주었다. 컬러 삽화는 당시 인쇄 기술의 진보를 넘어, 교육에 대한 국가적 의지와 자부심을 상징했다.
이처럼 광복 직후 제작된 교과서들은 단순한 교육 자료가 아니라, 한 민족이 수탈과 침묵의 시간을 견디고 자주와 재건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지식의 성전(聖典)이자 문화 독립 선언문이었다. 이러한 교과서 한 장 한 장에 담긴 열망과 실천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교육 주권의 기초이자, 다시는 잃어서는 안 될 소중한 유산이다.
“문자의 단순성과 발성의 힘에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미국의 선교사, 교육자, 한글학자)
《사민필지》 –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근대 교육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시기. 한 외국인이 조선의 미래를 위해 순한글로 교과서를 썼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자인 헐버트가 1889년에 저술한 《사민필지》는 세계 지리와 문화를 소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자,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였다.
《사민필지》, 호머 헐버트, 1889.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육영공원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세계 지리 교과서이다. 세계의 지리와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순한글로 간행하였다.
당시 조선은 세계 정세에 어두웠고, 백성들은 문자 해독조차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사민필지》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순한글로 쓰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자를 읽지 못하던 백성들도 세상의 지식을 접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것이다. 이 책은 육영공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고, 근대 교육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헐버트는 조선의 문자, 곧 한글의 과학성과 독창성에 깊이 감탄한 인물이었다. 그는 1886년 소학교 교사로 조선에 초청되어 지리를 가르쳤으며, 1892년에는 한글의 기원과 우수성을 설명한 최초의 학술 논문인 〈조선 글자〉를 발표했다. 더 나아가 제자 주시경과 함께 한글 문장 부호 체계를 정립하고 띄어쓰기를 도입했다. 한글을 단순한 문자가 아닌 교육을 위한 실천적 문자로 만든 이가 바로 헐버트였다. 그는 생전에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남겼고, 실제로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그의 뜻이 잠들어 있다.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교과서 운동
헐버트의 뒤를 이은 조선의 한글 운동은 주시경으로부터 본격적으로 계승되었다. 주시경은 1913년 조선어 학회의 명칭을 ‘배달말글 몯음’에서 ‘한글모’로 바꾸며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이때부터 ‘한글’은 단순한 문자 명칭을 넘어서, 민족의 글이라는 자부심과 교육의 기반이라는 인식을 함께 품게 되었다.
주시경의 제자들은 1921년 ‘조선어 연구회’를 결성하고, 이후 1931년 ‘조선어 학회’로 발전시켜 한글을 보급하고 체계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들은 동인지 《한글》을 통해 민중 교육의 필요성을 외치며, 조선어 사전 편찬과 더불어 교과서 제작을 위한 언어 표준화 작업을 진행했다. 1933년 발표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시작으로 ‘표준어 사정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잇따라 확정하며, 교과서의 언어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앞장섰다. 이는 교육의 혼란을 줄이고, 일관된 국어 교육이 가능하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선행 과제였다.
사전을 넘은 교육의 기틀, 한글로 기록한 지식의 뿌리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과업은 《조선말 큰사전》 편찬이었다. 단어와 표현, 발음, 표기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사전은 단순한 어휘 집대성이 아니라, 우리말 교육과 교과서 편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지식의 뿌리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두려워했다. 1942년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다수의 회원들이 구속되고, 원고는 몰수당했다.
《조선말 큰사전》, 조선어학회, 1947~1957. 164,125개의 어휘를 수집하여 한국어로 풀이한 국어사전이다.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어 작업에 들어간 지 28년 만인 1957년 10월 9일 완간되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서울역 창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된 사전 원고 뭉치는 다시 민족의 손에 돌아왔다. 이후 1947년 한글날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이 발간되었고, 1957년까지 총 6권이 완간되었다. 이 사전은 해방 이후 새롭게 편찬된 국어 교과서들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며, 우리말 교육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글은 단지 과학적인 문자 체계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억압받던 시대에도 배우고 가르치려는 열망을 담는 도구였고, 교과서는 그 한글을 실천으로 옮긴 공간이었다. 헐버트가 순한글로 《사민필지》를 썼던 이유, 조선어 학회가 표기법을 통일하고 사전을 만든 이유는 모두 우리말로 교육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한글로 쓰인 교과서는 말을 지키고, 민족을 일깨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기록이었다. 그것은 ‘우리 글로 우리 지식을 전하겠다’는 선언이자, 식민지 시기에도 꺾이지 않은 교육의 의지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노력이 만든 토대 위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배우며, 한글로 지식을 확장해 나간다.
광복 이후, ‘교과서’는 더 이상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았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살아남은 교육의 의지, 글자를 되찾고 역사를 다시 쓰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교과서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교과서는 단지 공부를 위한 책이 아니다.
시대의 얼굴이자,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기록이다.
금서의 검은 그을음 속에서도, 폐허 위에 쓴 첫 글자 속에서도 교과서는 늘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교과서들을 다시 꺼내어 본다.
그 속에 담긴 뜻과 마음, 꿈과 저항을 읽어내며
다시금 우리 교육의 출발점을 되새긴다.
‘광복과 함께 한 우리의 교과서’는 단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교육이 어떤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묻는
오늘의 이야기다.
비상라키비움. 한글과 함께 성장한 교과서의 역사, 그 교과서와 함께 한 우리의 문학 작품들을 총망라한 전시 공간이다.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 우리말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교과서인 《조선어독본》과 금서들, 그런 부조리한 현실에서 한글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이 담긴 《조선말 큰사전》을 비롯하여, 1954년 제1차 교육과정부터 현재까지의 전 과목 교과서들, 교과서를 빛낸 우리 문학 작품 등 17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비상교육은 교과서 발행사로서 교육의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교육 기업으로서 사회에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본사(경기도 과천)에 이와 같은 전시 공간을 마련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라키비움은 '도서관'(Library), '수장고'(Archives), '박물관'(Museum)의 성격을 통합적으로 갖춘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202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