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괜스레 우울하다. 우중충한 바깥 하늘, 한 층 더 어두워진 작은 창 속의 세계, 그 안에 비치는 작은 내 방. 눈을 떠봐도 몸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끝내 몸을 가만히 누인 채로 오늘 하루 쉼을 결정한다. 비가 좋은 이유는 이것이다. 오늘을 쉬어갈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해 준다는 것. 비의 우울함이 나는 좋다.
이불에 파묻힌 채 잠을 다시 청했다. 오늘 하루만큼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잊고 꿈을 꾸었다. 요즘 들어 꿈을 자주 꾼다. 꿈속에서는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꿈에서마저 불행하다. 아니 꿈이 현실보다 더 가혹한 것은 기분 탓일까? 꿈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어쩐지 서글퍼져 잠에서 깨어난다.
토독토독 빗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창이 안쪽으로 들어있어 오늘같이 비가 하루 종일 내리는 날에도 온종일 창문을 열어놓아도 괜찮다. 나와 빗소리만이 존재하는 어둑한 방 안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풀잎을 적시는 빗방울이 소리친다. 창문은 분명 오른쪽에 있는데 어쩐지 왼쪽 귀에서도 물이 튀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 내가 누운 자리를 빼고 온통 빗속에 있는 것 같다.
시계는 벌써 한낮을 가리킨다. 낮과 밤의 하늘이 같으니 시간의 흐름을 알 수가 없다. 아직 비는 쉴 새 없이 흐른다. 자리에서 일어나 느지막이 움직인다. 큰 창 너머로 보이는 벚나무는 어느새 풍성한 분홍빛을 잃고 꽃받침과 듬성듬성 보이는 여린 새 잎, 간신히 지켜낸 꽃망울을 달고 있다. 문을 살짝 열어두어도 좋다. 싸늘한 공기 대신 봄의 시원한 공기가 거실 안으로 훌쩍 들어온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휴대폰을 꺼내 메인 탭에 들어간다. 올해 봄의 이상 기후에 대한 기사가 뜬다. 올봄은 비가 오는 날이 거의 없다고 -창밖은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지만-바닥을 드러내는 저수지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이런 날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집 밖을 나선 나의 사랑하는 누군가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하면 어떡하나, 지구온난화가 심해져 내가 채 꿈을 펼치기도 전 모든 게 끝나면 어떡하나. 그러고는 삶의 의욕을 조금 잃는다. 내가 하는 모든 게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걱정할 일이라고 당장 내 앞에 놓인 내일의 하루라는 것을 자각하고선 크게 관심 두지 않으려 하겠지-.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상상하며 혼자 분을 내고 속상해한다. 슬픈 노래를 찾아 듣고 원을 그리는 웅덩이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그 처짐이 좋다. 그 우울함이 좋다. 손등을 스치는 시원한 기온과 촉촉한 냄새, 높아진 습도와 어둑한 하늘이 좋다. 비 오는 날에만 느낄 수 있는 그 처짐이 좋다.
우울함이 좋다는 말은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음, 실은 나도 명확한 이유를 정의 내리지는 못했으니까. 오늘을 보내며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다.
이불을 덮고 점차 멎어가는 빗소리와 함께 글 한 편을 써 내려간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 아이유의 우울시계, 이선희의 여우비. 비 오는 날의 사운드 트랙. 어쩐지 고전적인 글 한 편을 봐야 할 것만 같다. 오만과 편견 같은, 그런 극적인 말투의 편지 한 통.
어느 날 그런 꿈을 꾸었다. 비를 맞는 일.
드넓게 펼쳐진 풀밭에서 얇은 원피스 한 겹을 걸치고선 우산도 없이 맨발로 잔디를 밟고 뛰어다니는 한 낮. 흠뻑 젖어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환하게 웃는 일. 나무에 매달린 물기를 털어내며 열매를 따 먹는 상상.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숲에 홀로 올라가 어스름한 하늘과 울창한 나무 아래 달콤 쌉싸름한 유자와 거친 흙 내음을 맡으며 발바닥으로 배어 나오는 물기를 느끼는 일. 난데없이 있는 벽난로가 있는 통나무 집 안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젖은 몸을 말리는 상상.
비긴어게인의 한 장면 같이 비 내리는 결혼식을 올리며 쓰러질 정도로 환히 웃는 일, 투명한 우산을 나눠 쓰며 그 아래에서 웃음을 나누는 일, 샤워하고 나와 시원한 아이스 라테 한 잔과 함께 비 내리는 밖을 바라보는 일, 키우던 수국이 비를 맞고 물방울 흘려보내는 일.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오로지 이 세상에 나와 비만이 존재하는 상상.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상상. 이 세상과 나의 끝이 온다면, 비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수증기처럼 사라지고 싶다.
비가 오면 가는 곳이 있나요? 비가 오는 일요일엔 한 카페를 찾아가요. 언젠가 비 오는 일요일의 그녀-라고 불리기를 기대하면서. 그곳은 어울리지 않게 골목에 덩그러니 놓여있어요. 작은 무드등 하나가 입구를 알리고 있고, 사시사철 어두운 실내를 유지합니다. 큰 창이 나 있는 창가 자리가 딱 하나 있는데, 그 자리에 앉으면 밖에서 키우는 식물까지 고스란히 보여 마음이 편안해져요. 작은 가게 안에서 커피 물 끓이는 소리를 들으며 주로 쫀득한 떡이 올라간 빙수를 먹습니다. 딸랑- 나서며 다시 우산을 필 때면, 그때가 비 오는 일요일이죠.
저녁이 되니 비가 그칩니다. 비가 좋지만, 비가 그쳐야지만 활기찬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겠죠. 밝은 해가 떠오를 내일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