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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의 그늘에 가려졌던 '다른' 브론테

연극리뷰 <언더독: The Other Other Brontë>

by 이소희


짓밟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던, 그 적나라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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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인 에어>를 사랑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단단함, 부당함에 맞서는 용기, 그러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섬세한 감성을 지닌 제인.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적인 삶과 사랑을 모두 쟁취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언제나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그토록 강렬한 인물을 창조해 낸 샬롯 브론테와 그녀의 자매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브론테 자매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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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언더독>은 영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브론테 가문의 세 자매, 샬롯과 에밀리, 그리고 앤의 이야기다. 남성 중심의 문단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려는 첫째 샬롯,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고요히 쌓아 올리는 둘째 에밀리, 그리고 ‘뽀얀 새앙쥐’처럼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갈망을 품은 막내 앤.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그들의 성공 신화가 아닌, 연대와 경쟁, 사랑과 질투가 뒤엉킨 관계의 균열을 파고든다.


샬롯 브론테(강나리 배우)가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에요!”라고 외치며 시작하는 첫 장면부터 압권이었다. 그 외침은 단숨에 관객을 극으로 빨아들였고, 동시에 이 이야기가 비단 브론테 자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을 암시하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무겁지만 흡입력 있는 무대였다. 배우들의 연기에 푹 빨려 들어가 16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배우들이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방대한 양의 대사에도 불구하고 몰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각본이 탄탄하니, 그 위에 배우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샬롯(강나리 배우), 에밀리(박선혜 배우), 앤(윤소희 배우)은 단순히 브론테 자매를 연기하는 것을 넘어, 각자의 역할을 집어삼킨 듯 그 시대의 절박함과 욕망을 온몸으로 토해냈다. 단언컨대 연극 <언더독>은 내게 올해 최고의 몰입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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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도 밟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 여성이라면 아무리 잘 써도 출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남성 중심의 문단. 여성 작가 자리는 단 하나뿐이었기에, 자매는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밟아야만 했다. 남자의 이름으로, 익명으로 글을 내야 했던 잔인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가 되었다. 언니가 동생의 글을 뺏어 쓰고도, 동생을 소극적이라 폄하하면서도 끝내 미워하기 힘들었던 복잡한 심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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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연극 <언더독>은 그 시대의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그리고 묻는다. 이는 비단 과거의 이야기일까? 한정된 기회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때로는 가장 가까운 이를 밀어내야 하는 경쟁에 내몰리는 것은 오늘날 수많은 ‘언더독’이 겪고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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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작품은 유독 막내 ‘앤 브론테’의 이름에 집중한다. <제인 에어>의 샬롯, <폭풍의 언덕>의 에밀리라는 거대한 이름에 가려져 ‘세 번째 자매’ 혹은 ‘다른 브론테’로만 불렸던 앤. 연극은 소극적이고 유약하다는 평가 뒤에 가려진 그녀의 열망과 문학적 성취를 재조명한다. 어쩌면 <제인 에어>의 발판이 되었을지 모를 자전적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 그리고 출간 당시 파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와일드펠 홀의 소유주>까지. 이토록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도 후세에 제대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던 앤. 연극은 이렇듯 역사 속에서 잊히고 왜곡된 언더독의 목소리를 무대 정중앙으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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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을 나서며 다시 한번 이 무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토록 날카롭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난 것은 오랜만이다. 각본, 배우, 무대 연출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연극이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언더독’의 숨겨진 이야기를 이토록 강렬하게 만났으니, 어찌 다시 찾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젠가 세상의 모든 언더독이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누군가를 밟지 않아도, 말하는 그대로, 행동하는 그대로 온전히 존중받는 날이 오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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