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그냥 소주
꽤나 비싼 회비를 주고 참석한 와인 모임에서 뜻밖의 고백을 들었다. 아무리 좋은 양주를 마셔도 소주는 못 끊겠다는 말이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온 고가의 병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이게 무슨 소리지. 호기심에 귀가 쫑긋 거렸다.
원래 와인에 입을 대기 시작하면 소주는 쳐다도 보지 않게 된다고 했다. 특별한 향이나 맛도 없이 그저 알코올을 물에 희석시킨 액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손이 가질 않는다고. 나 역시도 슬슬 소주와의 작별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냥 그분의 의견인가 보다 하고 향긋한 잔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게 아닌가. 놀란 마음에 도대체 왜냐는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다.
"소주 한 잔에는 말이야, 내 인생이 담겨있어."
대학 시절 사랑에 실패하고 죽자고 마셨던 쓰라린 한 잔, 사회생활의 고됨을 풀어 주었던 시원한 한 잔, 감춰둔 사연을 털어놓는 사이에 친구가 따라준 위로의 한 잔, 삶의 작은 성취 때마다 함께했던 축하의 한 잔.
그분은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이 안에 들어 있다며 촉촉한 눈빛을 반짝였다. 이제 막 우아한 생활을 시작해 보려던 나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주위에 앉은 사람들도 동조하며 저마다 한 잔의 추억을 꺼냈다. 모두가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며 조금 전과는 달라진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와인을 마시면 그 술에 관한 대화를 하곤 했다. 이 병은 어느 나라에서 왔고, 와이너리의 특성은 어떻게 되고, 생산자는 누구 인지 같은 정보들이 주를 이뤘다. 향이 어떤지 맡아보기도 하고 바로 따서 마셨을 때와 한두 시간 열어 두고 마셨을 때 언제 가장 맛있는지 서로 의논을 하기도 했다. 오로지 술에만 집중해서 한 병을 파헤쳤다.
무색, 무미, 무취의 소주는 아니었다. '여기 와인 한 병이요, 이모 소주 하나요.'라는 말을 뱉어 보면 뉘앙스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뚜껑을 따자마자 오늘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래서 좋았고, 그래서 싫었고. 시시콜콜한 하루를 마치 고해성사하듯 다 내뱉었다. 그날의 주인공은 오직 나였다. 아무런 특이점도 없는 색, 맛, 향을 나만의 서사로 채워나가는 느낌이었다.
"내 얘기를 누가 들어줘, 소주는 다 들어줘."
값비싼 와인을 소주 마시듯 들이켜던 그분은 붉어진 얼굴로 한탄을 하듯이 말했다. 유난히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오늘도 누군가는 투명한 잔을 앞에 두고 자기 이야기를 건네고 있겠구나. 수십만 원을 웃도는 와인병 앞에서 몇 천 원짜리 소주 한 잔이 몹시 그리워졌다. 결국엔 나도 오래도록 소주잔을 내려놓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동안 부족한 작품을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빛나는 작가의 소주 한 잔에 담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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