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배웅하는 산자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곳
대전 현충원, 내년을 기약을 할 수 없는 장소다. 비장함으로 코비드19을 뚫고 산 넘고 물을 건넜다. 내년을 장담하지 못하는 고국 행은 걸음을 뗄 때마다 눈물이 묻어난다. 아버지의 비석이 와락 반갑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유골 가루가 담긴 단지를 품은 땅은 말이 없다. 작년에 내가 꽂았던 빛바랜 조화 꼴이 말이 아니다. 낡은 조화를 뽑고 새 조화로 바꾸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직 엄마 데리고 가지 마세요.
모친은 내가 한국에 도착하기 며칠 전에 동네 식당에서 떡만둣국을 드신 게 탈이 난 모양이다. 자가 격리 기간 내내 나는 엄마를 위해 삼시 세끼 죽을 끓여댔다. 20일이 넘게 식사를 제대로 못한 여든 다섯의 육신은 갱도에 갇힌 광부의 몰골과 흡사했다. 꿈을 꾸었다. 꿈에 엄마는 자줏빛 한복을 입고 무거운 보퉁이를 들고 있었다. 진부령 고개를 넘어야 한다며 보퉁이를 들고 사라졌다. 죽을 먹어도 속이 부대낀다는 엄마에게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자가 격리를 마치자마자 대전행 기차표를 끊었다. 현충일에 꾼 꿈이 마음에 걸렸다. 격리 때문에 옴짝 달싹 못하고 집에서 현충일을 맞이하던 날 새벽,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다. 생전의 일상처럼, 아버지와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불안해서 그런 개꿈을 꾼 거라고 애써 부인했지만 며칠 간격으로 부모님이 번갈아가며 꿈에 나타나니 기분이 개운치가 않다.
그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나는 현충원 안에 있는 나눔의 집으로 향했다. 해마다 현충원을 찾았던 유족이라면 소나무 기둥에 걸려있던 ‘구암사 무료국수’ 현수막을 한 번쯤 봤으리라. 나도 몇 년 전 용기 내어 구암사 국수 한 그릇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 그 인연이 계기가 되어 현충원을 찾으면 북천스님께 인사를 드린다.
북천스님의 음식공양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의 6.25 한국전쟁 위령제는 비가 내렸단다. 250명분의 음식을 부탁받았지만 300명분으로 넉넉히 준비해서 위령제를 치르던 북천스님에게 한 유족이 다가왔다. 스님은 그 유족의 얼굴에서 사람이 혼백이 나가면 얼굴빛이 어떤 낯빛이 되는 지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고 전한다. 북천스님이 건네는 따뜻한 한 끼는 생때같은 아들을 잃어 경황이 없는 유족의 뼛골 사이로 스며든 냉기를 녹여주는 음식이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진 공양의 시작이었다.
대전 현충원 주변에는 음식을 사먹을 곳이 마땅치가 않다. 자가용을 타고 비석 한 번 쓰윽 둘러보고 가는 유족들은 절대 알 수 없는 허기짐이 있다. 참배 오는 유족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시작했다던 국수공양은 불심이 가득한 구암사 신도들이 밝히는 연등 불빛이다. 기차타고 버스타고 걸어 온 유족들을 위해 색색의 꿀떡과 도넛이 준비돼 있는 나눔의 집은 죽음을 배웅하는 산자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