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1인용 감성
by 카피라이터 둘 Mar 04. 2018

왜 헤이즐넛 커피는 사라졌을까

1인용 감성, 08



  사라진 헤이즐넛 커피를 찾습니다. 


  본 사건의 경위는 군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취사병이었던 동기가 장교들이 마시는 원두커피를 한 잔 내려줬다. 군대리카노라 그런지 커피에서 달큼한 냄새가 났다. 손이 차분한 요리사가 약한 불에 꽃과 땅콩을 함께 볶는 듯한 고소하면서도 상큼한 향. 그런데 마셔보니 웬걸, 일반 드립 커피처럼 묽은 쓴맛이었다. 와인을 처음 마셨을 때 든 배신감만큼 충격이 컸다. 


  제대하고 픽시 자전거 유행이 시작할 무렵 지인이 홍대에 픽시 자전거 전문점을 차렸다. 힙스터라는 말이 수입되기도 전에 이미 힙스터였던 그의 가게 근처에는 커피 생두를 볶아서 파는 로스팅 전문점이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헤이즐넛 원두가 있냐고 로스터에게 물었다. 로스터는 '헤이즐넛 원두는 세상에 없으며 가짜 커피다. 본인이 진짜 커피를 가르쳐주겠다'라고 했다. 그냥 없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짜든 진짜든 나는 헤이즐넛 커피가 마시고 싶단 말이다. 



헤이즐넛이 커피가 아니라고?


  헤이즐넛은 커피가 아니라 견과류다. 흔히 개암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서양개암이다. 헤이즐넛 커피를 만드는 법은 단순하다. 로스팅한 원두에 헤이즐넛 향만 뿌리면 된다. 하지만 향을 입히면 원두를 갈 때 그라인더에 무리가 가서 보통은 헤이즐넛 시럽을 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카페에서 헤이즐넛 시럽을 추가하면 들쩍지근한 것이 내가 찾는 맛이 아니었다. 


  커피 전문가들에 따르면 향커피는 원두가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차단막을 입히는 데서 시작했다. 차단막으로 쓰이는 액체에 독성은 없으나 금속 냄새가 나는 탓에 인공 향을 입혔고 어차피 향을 입힐 것이니 신선하고 비싼 원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비싼 커피 마실 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피하면 되시겠다. 



90년대 패션 커피


  헤이즐넛 커피는 90년대 초 압구정동 문화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였다. 지금의 ‘힙’처럼 세련된 것에 패션이라는 말을 붙였던 당시에는 '패션 커피'로 불리기도 했다. 문제는 헤이즐넛 커피를 고급 커피로 둔갑시켜 일반 커피 가격의 곱절을 받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지게 된 계기에는 소비자들이 헤이즐넛 커피가 가짜라고 인식한 탓이 클 것이다. 


  97년 스타벅스가 들어오면서 얼음 더미에 에스프레소를 끼얹고 냉수를 들이부어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우리나라 커피 문화를 점령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메리카노가 이탈리아에서만큼은 가짜 커피라고 한다. 이탈리아인은 바에 서서 들이키는 한 잔의 까페만이 진짜 커피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가짜를 지워나가다 보면 우리는 발가벗고 물만 마셔야 할지도 모르겠다.


스파이크 존즈, <그녀> / 유니버셜 픽처스


진짜로 진짜는 뭘까


  극단적인 커피 순수주의자들은 향커피를 경멸한다. 이처럼 어떤 이들에게는 ‘좋은 게 좋은 거지’가 안 통한다.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엄격한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은 발전이 없을 것이다. 나처럼 헤이즐넛 커피가 좋다고 마냥 홀짝이는 사람만 가득하다면 말이다. 장인은 자고로 진짜를 좇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짜와 거짓은 대부분 함께 온다. 게 맛 나는 명태살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허탈했던가. 하지만 우리를 속이려는 거짓을 걷어내면 가짜는 진짜만큼 순수하다. 게맛살에도 진짜 게살이 줄 수 없는 게맛살 나름의 맛이 있다. 진짜가 아니라는 이성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가짜가 좋다면, 진짜란 과연 무엇인가.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 <그녀>에서 인공지능 사만다는 말한다. '최소한, 당신의 감정은 진짜예요.' 



행복은 의외로 가까이에 없다


  얼마 전 국내 커피 전문기업 J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88년에 문을 연 J사의 압구정 1호점은 당대 가장 힙한, 아니 가장 패션한 카페였다고 한다. 지금은 프랜차이즈 사업에서 철수했지만, J사의 헤이즐넛 커피를 편의점에서 살 수 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90년대 초를 풍미한 J사의 커피라면 진짜 '가짜 헤이즐넛 커피'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가슴이 뛰었다. 행복은 가까이 있어도 안 보인다더니.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편의점에 들렀다. 봉지를 뜯으니 헤이즐넛 향이 훅 올라왔다. 옳다구나. 그런데 마셔보니 웬걸, 설탕물이었다. 역시 취향은 피곤하다.







1인용 감성: 최소행복 탐구

사소한 것에 대한 1인의 감성에서

최소소수의 최소행복을 찾습니다.

keyword
magazine 1인용 감성
댓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