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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니 Jan 23. 2021

공부하는 삶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다. 십 대 때는 시험공부가 인생의 전부였고 이십 대에는 이성에 대한 공부, 삼십 대에는 자아 탐구에 매진했다. 사십 대는 어이없게도 해놓은 것 없이 속절없이 흐른 세월에 대한 원망과 함께 사십춘기가 찾아왔다. 성장과 성숙에 대한 강박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긍정적인 다짐을 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 정체를 견디지 못하는 불안증과 조급증을 몰고 왔다. 여기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덤.


어렸을 때는 책상 앞에 앉아 교과서 외우고 문제집 푸는 게 공부의 전부였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읽고 쓰고 외우고 하다 보면 스텝 바이 스텝 성장의 모먼텀이 생기고 그 단계를 잘 밟아가면 합격 또는 취득의 결과를 손에 쥐었다. 그렇게 공부 잘하는 누구네 딸로 불리던 때도 있었다. 공부의 결과=시험 통과라는 공식에 익숙해졌고 대학 합격과 취업이라는 인생의 큰 산을 넘자 나는 착각의 늪에 빠졌다.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교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평생 공부를 달고 살 수밖에 없다. 내가 맡은 수업을 목표에 맞게 잘 구성하여 학생들의 성장을 도울 때 느끼는 뿌듯함이 교사로서의 존재가치를 지탱해주었다. 수업에 대한 전문성이 임용고사를 통과한다고 프리패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해마다 맡게 되는 학년에 따라, 또 옮기는 학교에 따라 교과서와 가르칠 내용이 달라지니 교사는 늘 연구하고 공부할 수밖에 없다. 자기 계발에 적극적인 동료 교사들이 주변에 있을 때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는 더 확실해지고 수업에 대한 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강력한 자극제가 된다. 어찌 되었든 직업적 환경의 영향으로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착각은 더 견고해졌다. 


유튜브 전성시대이지만 책은 여전히 공부에 꼭 필요한 선생님이다. 독서의 중요성은 모두가 알지만 누구나 독서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어렸을 때 오빠 읽으라고 사다 놓은 세계문학전집이 구석에 방치되자 곧 내 차지가 되었고 그렇게 독서의 세계에 입문했다. 어른들의 심오한 세계를 얼마나 이해했다고 그렇게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멈출 수 없었던 그 즐거움과 설렘을 기억한다. 한 때 그 해 다독왕으로 뽑혀 사서 선생님이 준비한 상품도 받을 만큼 책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에 나는 당연히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두 달여 가량 금주도 금연도 아닌 '금독'을 하고 있다. 가까이에 책을 두고도 손이 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 자아개발과 정보 획득을 위한 공부의 수단이 되면서 독서 피로도는 높아지고 즐거움은 멀어진 탓일까. 


입시 지옥, 고시 지옥, 1급 정교사 자격을 위한 1정 연수, 대학원 과정 모두 공부의 마무리는 시험이었다. 배운 내용을 확인하는 그 시험이라는 절차는 공부의 최종 목표이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통행로였다. 과정의 즐거움보다는 목표의 달성이 중요한 공부였다. 인생에서 공부가 즐거웠던 순간을 열심히 떠올려보니 교직 5년 차에 운 좋게 6개월 파견 연수를 다녀왔던 때가 생각난다. 서울의 모 대학원에서 월-금 나인 투 파이브 촘촘한 시간표를 꽉 채워서 수업을 들었었다. 주제와 분야는 달라도 특별히 대단하거나 새로울 것 없는 전공수업이었다. 출결 외에 시험 성적을 요구하지 않은 첫 연수여서 그랬던 걸까. 시험이 없다면 느슨하게 대충대충 했어도 그만인데 오랜만에 진짜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며 수업-과제-토론으로 반복되는, 어쩌면 지루하고 지겨울법한 공부 패턴이 너무 몸에 맞았다. 동료 선생님들과 매일 소통하면서 함께 과제하는 배움의 과정이 즐거워서. 원 없이 몰입해서 정말 신나게 공부했다. 

  


항상 꾸준히 할 수 있는 취미 하나를 가지고 싶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퀼트, 피아노, 기타, 요리, 요가, 필라테스, 수영, 발레, 등산 등등.. 이 외에도 각종 원데이 클래스를 들어가며 직장인 취미 생활로 할 수 있는 것들에 끈덕지게 손을 댔지만 배움의 즐거움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너무 잘하고 싶어서. 또다시 발동한 성. 장. 강. 박. 더딘 실력 향상은 배움의 과정에 부담을 주고 자책을 남겼다. 나는 취미에 소질이 없는 사람. 포기를 선언한다!

그러던 내가 작년에 처음으로 그림을 배우면서 이거다 싶은 유레카를 발견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의 서툰 솜씨와 속도를 존중하면서 선생님은 그렇게 나를 가만히 놓아주었다. 조용한 방에서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오늘 안 되면 내일. 내일 안 되면 다음 주. 시간과 밀당하면서 그렇게 천천히 그림의 세계에 스며들었다. 또다시 몰입의 즐거움이 찾아왔다. 


시험을 최종 목표로 두지 않고 과정의 즐거움에 몰입할 수 있는 진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습관과 본능은 너무도 강력한 것이어서 정체에 대한 불안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든 나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다. 공부를 지속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잡생각을 물리치고 긍정으로 무장하며 외로움을 달래는 일.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말자. 성장에 집착해서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자. 배움의 과정에 몰입하면서 조금씩 즐거움을 알아가자. 지금 하려는 공부가 다시 한번 배움 자체에 열정을 느끼는 순간으로 기억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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