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단 한순간도 간호사가 되기를 꿈꾼 적도, 간호사가 되어 있는 나를 상상한 적도 없었다. 중학교 때 개인 시간을 할애하여 역사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따로 수업을 해주셨던 열정적인 사회 선생님을 만난 이래, 나의 꿈은 줄곧 사학자였으니.
그런 내가 간호사의 길로 발을 내딛게 된 것은 순전히 수능 성적 때문이었다. 두 번째 수능에서 서울대학교 인문학부에 지원하기에는 모자라고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는 무난히 합격할 만한(실제로 합격한) 성적이 나왔으나, ‘서울대’라는 타이틀에 욕심을 버리지 못해 간호학과로 지원했다. 일단 들어가고 전과를 하자는 생각이었다.
면접을 앞두고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간호사 진로 관련 서적을 살펴볼 때였다. 삼류 드라마에서조차 나오지 않을 장면이겠건만, 마침 등 뒤에는 역사 관련 서적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학벌에 대한 욕심 때문에 다른 길을 택한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서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어쩌면, 그때 나는 이미 나의 선택을 되돌릴 수 없음을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입학한 동기들이 많다는 것, 그 때문에 전과를 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했음을 깨달은 건, (literally) 달리기만 하다가 일 년이 지나간 뒤였다.
꿈꾸지 않은 미래였지만, 수업을 듣고 실습을 하며 간호학과에 진학한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 눈앞에 놓인 것만 좇으며 공부만 했던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태도를 배웠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지극히도 당연한 사실과, 그러므로 때로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러려니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나는 이곳에서 배웠던 것 같다.
후회의 연속이었던 스스로의 선택에 처음으로 다른 감정을 느낀 건 요양병원에서 노인간호학실습을 할 때였다. 치매가 있는 할머니께서 침대에 누워 연신 당신의 고향 마을 지명을 부르짖는 걸 보며, 나는 지적 장애가 있는 나의 이모를 떠올렸다.
네 살이 될 때까지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 이모와 함께 살았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분가를 한 뒤에도 나와 언니는 종종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외할머니 댁은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고, 20여 년 전이면 ‘워라밸’이란 개념조차 없을 시기라 맞벌이셨던 부모님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나를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는 외할머니를 매우 좋아하면서도, 외할머니 댁에서 자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25년이나 지나버려 그때의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이모가 싫어서’였지 않았을까. 어린 나는 지적장애가 뭔지는 몰라도 이모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꽤나 성깔(?)이 있었던 유년 시절, 이모와 소리를 지르며 싸웠던 여러 장면들이 기억 속을 스쳐 지나가는 걸 보면 나는 이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나란히 앉을 때라곤 이모가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 차가운 믹스커피를 엄마 몰래 나눠마실 때뿐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이모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 그대로 혼자 살았고, 엄마는 1주일에 두어 번 정도 반찬을 가져다주러 갔다. 짐작컨대 엄마는 이모에게 지적장애가 있긴 하지만 일상생활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모는 (당시 용어로는) ‘정신지체장애 3급’으로 판정받은 상태였고, 실제로 혼자 외출하여 장을 보고 식사를 하는 등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외할머니와 이모의 관계는, 자연에 빗대면 숙주와 기생수의 관계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외할머니의 존재가 이모의 생명을 겨우 붙들고 있었던 것인지, 외할머니의 죽음 이후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이모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언니를 잘 돌봐달라’는 외할머니의 유언을 지키고자 하는 엄마의 굳건한 의지 덕분에 이모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이모가 누워 있기만 할 땐 오히려 괜찮았다. 어린 나에게 소리를 지르던 이모가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간병인의 노고 덕분에 몇 달 뒤 이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