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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굼벵이 Oct 20. 2024

할머니의 죽음

딸기와 복숭아, 짜파게티만이 남겨졌다

 카페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엄마’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소현아.. “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직감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

”응. 알겠어 “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몇 달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지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친할머니와 그렇게 각별한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두 딸이 학업 때문에 서울로 올라간 뒤, 20년 동안 살았던 30여 평의 집에서 50여 평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보통 자식들이 떠나면 더 작은 집으로 옮기기 마련이지만 그 반대였다. 2013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할머니를 부양하기 위함이었다.


  돌아가실 때가 다 되어서야 들은 얘기지만, 엄마는 할머니 기저귀를 갈아드릴 것을 각오하고 함께 살자는 얘기를 먼저 꺼낸 거라 했다.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할머니는 파킨슨 때문에 불수의적으로 손이 떨리는 걸 제외하면 연세에 비해 꽤나 건강하신 편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거동이 힘들기는 하셨으나,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를 하고 당신으로부터 나온 빨래는 스스로 해결하셨다. 미리 지어 얼려둔 밥과 국, 반찬을 가져다 드리면 다섯 평 남짓한 할머니의 방에 있는 전자레인지와 미니 인덕션으로 대부분의 끼니를 챙기셨다.

할머니방. 원래는 환자 침대가 아니라 돌침대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음료수, 반찬들로 가득하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참 단단한 사람이었다. 50대에는 아들을, 80대에는 딸을 먼저 떠나보냈음에도 할머니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참담한 심정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새벽마다 묵주를 알알이 세어가며 기도를 하는 것이, 어쩌면 쓰라린 마음을 단련시키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할머니가 글을 배운 것도, 엄마와 아빠가 결혼을 하고 나서 며느리를 따라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라고 한다. 성경을 읽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진행하는 한글수업에 몇 번 나가다가 홀로 글을 익히셨단다. 육십 평생 까막눈으로 살다가 기도를 하기 위해 글을 익힐 정도면, 기도로써 당신의 마음을 달래는 그 과정이 얼마나 필요했던 것일까. 나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할머니 방 한 켠에 있는 성모상과 십자가


  할머니의 단단함을 인지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대학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을 보며, 할머니께서 힘들게 돌아가시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엄마에게 할머니의 의사를 물었다. 알고 보니 할머니께서는 이미 몇 년 전에 당신의 의지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신 상태였고, 직접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고 계셨던 것 같다. 3개월 전 할머니의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었을 때 병원에 가자는 아들 내외의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이미 당신께서 그리는 죽음의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며칠 동안 설사를 하여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꺼리셨다. 나중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가급적이면 스스로 목욕을 하고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보고자 하셨다.


  ”7월인가. 할머니가 처음으로 대변 실수를 하셨어. 근데 할머니가 대변 묻은 옷을 숨겨놓고는 막내딸한테 전화해서 옷을 빨러 오라고 했다는 거야. 엄마는 그게 그렇게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었던 것 같아. “


  스스로의 대소변을 스스로가 치우는 행위, 그것은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는 최전선에 있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 가운데 낙상 위험이 큰 사람들에게는 기저귀 착용을 강력하게 권하는데, 노인분들 가운데에는 기저귀 착용 이후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거나 섬망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기저귀는 자신의 배설 행위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이자, 자립할 수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는 물건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닐까.




  돌아가시기 한 달 전 기저귀를 착용하신 이후, 할머니도 점점 약해져 갔다. 서울에 사는 자식과 손주들이 오면 잠깐이라도 몸을 일으켜 눈을 마주치고 손을 어루만지며 ‘잘 살라’고 하시던 할머니는, 점점 자리에 앉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밤에 잠을 주무시지 못해 근처에 있는 내과에서 수면제를 처방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90세가 넘는 연세에도 정신만은 늘 또렷하셨으나 날짜를 헷갈리거나 우리 엄마(며느리)를 딸이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엄마가 “제가 딸이에요?”라고 물으면 “밖에서 데려온 딸이지.”라고 이내 정정하기는 하셨으나.


  식사도 겨우 한 숟가락 드시는 정도였으나, 다행히 드시고 싶은 것이 항상 있었단다. 곰탕, 짜파게티, 너구리, 딸기, 복숭아… 그 종류도 다양했다. 할머니의 말 한마디면 무조건 따르는 전래동화에나 존재할 법한 효자인 우리 아빠는, 가을에 딸기와 복숭아가 먹고 싶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마트에 가서 냉동 딸기와 냉동 복숭아를 사 오셨다. 고모들은  ‘엄마가 이걸 어떻게 먹어. 큰일 나’라며 만류했지만, 아빠는 냉동 딸기를 녹여 작은 숟가락에 떠서 할머니의 입 안에 넣어 드렸다.


  주말에 연락했을 때만 해도 엄마가 “그래도 다행이야. 할머니가 드시고 싶은 게 있대. 아빠한테 딸기랑 복숭아를 사 오라고 하셨다네.”라고 했던 게 무색하게도, 그다음 날부터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거친 가래소리만 내뱉었다.




  월요일 오후 2시부터, 할머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성당에서 병자 성사를 오는 날이 되면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 머리를 빗은 채 방에 앉아 신부님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그날은 평소와 같은 옷차림으로 신부님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거친 가래소리와 함께 겨우 숨을 뱉어 내던 할머니는, 2024년 10월 17일 목요일, 서울에 사는 여섯째 딸이 온 뒤에야 온전히 숨을 거둘 수 있었다.


  당신께서 그토록 드시고 싶어 하시던 딸기와 복숭아, 짜파게티를 남겨둔 채.

냉동실에 남은 딸기와 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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