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내 마지막이라 울렸다

by 소현

어린 시절에는 세상이 내게 기울어져 있는 줄 알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언젠가 원하는 자리에 서 있을 거라 믿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넘쳤지만 정작 그 자신감을 갈고닦으려는 마음은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오래 매달려야 하는 일에는 금세 싫증을 냈고, 힘겹게 단련해야 하는 순간에는 쉽게 등을 돌렸다. 그때 나는 바람만 품고, 그 바람을 지탱할 땀을 흘릴 줄 몰랐다. 하루아침에 이뤄질 기적만 기다리며 눈앞의 가벼운 성취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서른넷, 손에 남은 건 하지 않았던 시간과 그 시간이 남긴 후회뿐이었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 나는 두려워졌다. 언젠가 먼 훗날 또다시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고 있을까 봐. 그 두려움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는 상상에서 비롯됐다. 그제야 알았다. 노력과 성실도 타고나는 재능만큼이나 중요한 능력이라는 걸. 하루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는 힘, 하고 싶지 않은 날에도 손을 뻗는 습관, 남들이 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다듬는 꾸준함. 그것이야말로 꿈을 현실로 데려오는 능력이라는 것을. 나는 그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능력을 너무 늦게 배웠다. 그 두려움이 나를 글 앞으로 데려왔다.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잘할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서. 글은 내 마지막이라고, 마음속에서 울리듯 들려왔다.


뒤늦게 사이버대 문창과에 들어갔을 때, 세상엔 잘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들의 문장은 힘이 있었고 내 글은 가볍고 초라해 보였다. 나는 그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금세 가슴이 움츠러들고 또다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저앉을까 봐 그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에서 '브런치 작가'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함께 듣던 학우들이 하나둘 그곳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작가라 불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오래 눌러 두었던 내 마음을 건드렸다. 부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여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지만 그만큼 간절함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이 조용히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그 물음은 망설임 끝에 결국 나를 움직였고 나는 브런치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여전히 서툴고 작았지만, 그곳은 도망치려는 나를 잠시 붙잡아 주었다. 누군가 읽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쓰고 있다는 사실, 나도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버티게 했다.


아버지는 늘 큰 꿈을 말하던 사람이었다. 세상 어디서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처럼, 자신을 믿는 말들을 자주 내뱉었다. 그러나 끝내 그 꿈에 닿지 못했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을 무책임이라 여겼고, 가정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를 원망했다. 말뿐인 약속을 반복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작년, 아버지를 떠나보내고서야 나는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도 나처럼 늦게 깨달았을지 모른다. 꿈은 좋아하는 일만으로는 이룰 수 없고 하기 싫은 순간까지 견디며 쌓아야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늦어버린 게 아닐까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만 흘러갔을지도. 아버지는 내 거울이 되었다. 나는 그 거울을 보며 다짐했다.


'나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후회를 남기지 않을 테야.'


내 꿈은 단순하다. 거창한 이름도 화려한 자리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글을 쓰는 사람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세계 안에 속하고 싶다. 그 곁에 앉아 함께 문장을 고민하고 마음을 나누는 자리. 그 안에 속할 수 있다면 나는 충분하다.


브런치는 내게 그 꿈의 입구다. 나는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고, 서툴고 더디더라도 멈추지 않고 쓰고 있다. 나중에 시간이 더 흘러간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다. 부족했지만 그래도 해본 사람이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남지 않았다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혹시 나처럼 늦었다고 느끼고 있을까. 원하는 자리에 아직 닿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을까. 그렇다면 전하고 싶다.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있다고. 후회만은 남기지 않을 수 있다고. 지금, 이 순간의 작은 시작이 언젠가의 나를 지탱해 줄 거라고. 내 절실함이 누군가의 숨을 고르는 자리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꿈의 한 조각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