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개의 변기를 닦고 나서야 알게 된 것

넷플릭스 '조용한 희망' 리뷰

by 언어유랑자


볼까 말까 몇 번을 재생버튼을 만지작거렸다. ‘조용한 희망’을 추천받은 건 꽤 오래전. 하지만 가정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아이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싱글맘이라니.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웬만한 공포영화보다도 무서웠다. 예고편만으로 너무 무겁고 벅차서 한참을 망설이다 포기해 버렸다. 그래, 역시 가벼운 게 최고지. 하며 늘 다른 드라마, 다른 영화의 재생버튼을 눌러버리곤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남아있었다. 아이를 안고 멍하니 앉아있던 그 주인공을 어떻게 되었을까? 집은 찾았을까? 살아남았을까? 행복해졌을까? 해가 바뀌고 드디어 용기를 냈다. 역시나 쉽지 않았다. 보는 내내 막막함에 몇 번씩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숨을 고르곤 했다.



어김없이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 버럭 화를 내며 던진 유리그릇. 그 유리파편이 딸 매디의 금발 머리카락에 흩어졌다. 딸의 머리카락에서 유리조각을 골라내며 알렉스는 다짐한다. 이 집을 나가야겠다고.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남편을 뒤로하고, 아이를 차에 태우고 도망친다. 수중의 돈은 고작 20달러. 그렇게 알렉스는 싱글맘이 된다. 얼굴에 멍든 곳도 없고, 몸에 어디 부러진 곳도 없다는 이유로 가정폭력으로 인정받기 쉽지 않지만, 알렉스와 매디 모녀에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집 밖이라고 해서 사정이 더 나은 건 아니다. 더 안전하지도 않다.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대학 진학도 포기한 알렉스에게 괜찮은 일자리가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일을 하면 애는 누가 보고? 일을 하려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데 어린이집에 맡기려면 일을 한다는 증명이 필요하단다. 복지제도가 선사하는 이 모순을 견디며 알렉스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남겨진 최후의 일자리인 청소부 일을 악착같이 해나간다. 그렇게 338개의 변기를 닦고, 사람이 죽은 폐허부터 호화롭기 짝이 없는 부잣집까지 청소한다.



"300개 하고도 38개의 변기 청소와
일곱 가지 정부 지원, 아홉 번의 이사, 페리 선착장 바닥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내 딸 인생의 3번째 해 전부."


드라마의 영어 제목은 Maid. 직설적이기 짝이 없는 제목. 하지만, 무언가를 치우고 닦으며 살아가는 청소부의 일이 결국은 알렉스 인생의 장애물을 치우고, 상처를 닦으며, 그렇게 홀로 설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단순하지만은 않다. 별 볼 일 없는 Maid라는 단어가 드라마 막판에 가면, 어쩐지 위대해 보인다. 반면, 한국어 제목은 ‘조용한 희망.’


옛 팀장님은 카피라이터가 쓰지 말아야 할 단어가 있다고 했다. 희망, 행복, 사랑. 같은 단어들. 낙관적이고 게으르고 뻔한 단어들. 그런데 ‘희망’이라니. 하지만, 자신을 넘어뜨리는 세상에 맞서 기어이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힘. 그것을 ‘희망’이라는 단어 말고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건 정말이지 조용하지만 질긴 ‘희망’이다.


“내가 눈이 이상한 거야? 아님 네가 빛이 나는 거야?”
“내가 빛나는 거야.”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드라마가 마치 “굳세어라, 알렉스”처럼 억척스럽고 착한 주인공을 내세운 고난극복기 같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느껴졌다면, 그건 순전히 내 설명이 부족한 탓이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불완전함에 있으니까. 알렉스가 착하냐고? 알렉스는 자신이 청소하는 집에서 절도를 하기도 하고, 회사계약을 어기고 손님을 빼돌리기도 한다. 실수를 하고, 바보 같은 선택을 한다. 하지만, ‘난 멍청해’라며 본인을 탓하고 벽에 머리를 찧는 알렉스를 보며, 우리는 속으로 외친다. 아니야, 잘못된 선택을 한 건 맞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알렉스의 엄마는 또 어떤가. 알렉스보다, 아니 알렉스의 딸 매디보다도 철딱서니가 없으며, 망상증에 조울증에 사고나 안치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런 알렉스의 엄마조차 알렉스가 어린 시절, 가정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망친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다. 누가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알렉스의 전남편 숀은 가정폭력 가해자임과 동시에 어린 시절 엄마에게 학대당한 피해자이다. 알렉스를 극한으로 내몰다가도 끝내는 매디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도록 선택을 한다. 숀은, 술을 끊을 만큼의 의지는 없지만, 매디를 놓아줄 만큼의 선의는 있는 사람. 선과 악 그 안에 존재하는 촘촘한 스펙트럼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착하기만 한 주인공도, 악하기만 한 악역도 없다. 모두 우리처럼 불완전하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그저 알렉스나 숀보다 조금 더 운이 좋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의 가장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곧 올 것이다.
하이킹은 힘들겠지만 우린 정상까지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정상에서 아이에게 말할 것이다.
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네 것이라고. “


어린 시절의 상처에 허덕이는 등장인물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이토록 불완전한데 어쩌다 생명을 키운다는 그토록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을까. 조금만 더 완전했다면, 상처받은 영혼이 덜 생겨났을 텐데. 하지만, 알렉스를 보고 있노라니 그 막중한 임무가 사람을 더 완전해질 수 있도록 끝없이 나아가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하기에 서로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렉스보다 아주 조금 운이 좋을 뿐인 나는, 다짐해 본다. 내 주변의 알렉스를 만나면 꼭 안아줘야지.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아주 조금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자신의 불완전함으로 다른 이의 불완전함을 조용히 껴안아주던 드라마 속 대니엘이, 데니스가, 레지나가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그려본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을 드디어 맞이하는 알렉스의 모습을. 한편으로는, 알렉스에게 그 행복한 날이 조금은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아니다, 가장 행복한 날이 언제일지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럴만한 자격은 충분하니까.



* <광고계동향 AD-Z> 2023년 1-2월호 T-Vibe에 연재했던 칼럼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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