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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적 Sep 03. 2023

여차하면 쌤도 엄마한테 학교에 전화해달라고 하자

이제 아무도 선생님 같은 직업은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 거다.

이제 누군가 스스로를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면 다들 안타까움 내지는 안쓰러운 대상으로 여기게 됐다.


자식은 물론이고 친조카도 없는데다 언쟁도 논쟁도 싫은 까닭에 이 주제만큼은 국으로 조용히 있다가 친구들과 사석에서나 조금 떠들겠다고 생각했고 이 일기를 쓰는 동안도 내가 너무 무자격자라고 생각해서 오늘 일기 역시 곧 숨겨버릴 지 모를 일이다.


어느 초등학교의 교실에서 선생님이 생을 달리했다.


내 또래, 혹은 그 이전의 세대에게 선생님이란 때때로 기분에 따라 물리적, 정서적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이기도 했기에 아동의 인권 신장이 중요한 문제였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하고 시계를 끄르던 어느 영화 속 배우의 연기가 실재했던 이야기에서 기인했음을 들어왔고 때론 목격했다. 그 대상이 초등학생이라고해서 녹록했을 리가 없는 시대의 이야기이다.


>라떼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나와 내 친구들이 학교에 다닐 때 어쩌다 부모님이 선생님을 만나기라도 하면(초등학교 때는 학부모 면담도 없었으므로 보통 운동회나 공개수업 정도) ‘잘못하면 많이 혼내주세요.’라고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선생님을 가정에서 가르칠 수 없는 영역의 교육(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덕목같은)을 대신 해 주는 공동체로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은 빠르게 교정될 수 있도록 꾸중에 거리낌 없이 관심 가져 주십사 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그래서 내가 잘 자랐다는 의미일 리는 없고 그런 수준의 엄격함마저 없었으면 몹시 고립된 채로 살고있을 거라고 생각함)<


하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런 정도의 악랄한 교사들은 물론, 기본적인 교육을 하려던 선생님들마저 그들 목이 날아가지 않게 조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문제되는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조치들로 인해 자칫 아동학대 신고라도 당하면 직위해제된 상태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일상이 너덜너덜해질 것을 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생님들은 말썽 부리는 아이를 그저 방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일선에서 공교육은 무너졌다고 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말썽 부리는 아이 한 명을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을 시작으로 그 학급에 나머지, 보편적인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는 것. 보편의 학생들이 문제 아동의 행동으로 괴로워해도 선생님에게는 그 아이들을 보호할 그 어떤 안전장치가 없다는 것.  


말썽을 일으키는 아이도 알고 있다고 한다. 수업을 방해해도, 같은 학급 아이들에게 막말을 하고 멋대로 행동해도 눈 앞의 교사가 자신에게 말 대신 어떤 물리적인 제재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을.(손들어 안돼, 뒤로 나가 있어 안돼, 눈 감고 있어, 엎드려 있어 안돼, 기타등등 다 안돼.)

수업이 나노 단위로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저지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이 침해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그들(문제 아동과 학부모)의 심기를 거스르면 일상이 모두 너덜너덜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한다.


친구는 뉴스와 SNS에서 접하는 망한 공교육 사례들은 과장 없이 사실이라고 했다. 그것이 아주 특수한 몇몇의 경우가 아니라 한 학급 건너 한 학급에서 일어날 정도로 빈번하다고.


국회 앞에서 아동 복지법 개정을 촉구하는 집회가 있었다고 한다. 친구도 그 곳에 있었다고 했다. 친구를 알고 지낸 20년 중 절반의 기간동안 그녀는 선생님이었고 좀처럼 힘들다거나 괴롭다는 말을 과격하게 하지 않던 무던한 친구였는데 최근 몇 년 사이 그녀는 강력한 무력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가 처음 부임했던 해에 유난히 말썽부리던 아이가 학년이 끝날 때 삐뚤빼뚤 적어준 카드를 자랑하던 모습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는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일선의 선생님들이 요구하는 것이 폭력적인 범주의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다수의 아이들이 일반적인 수준의 교육을 받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과격한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정도의 강제성일 것이다. (적어도 초등학교에서의 학습권 침해는 선생님들의 멈춤이 아니라 그들이 문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공교육의 위상에 있는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게 만들어두고 외치는 학습권이라니.)


친구에게 농담으로 ‘여차하면 쌤도 엄마한테 학교에 전화해달라고 하자.’고 했다. 농담이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친구도 집에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막내딸이다.

아마 자신이 수업하던 교실에서 생을 마감한 20대 초반의, 생때같은 선생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 부모님은 요즘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런 줄 알았다면 교대에 가겠다는 딸을,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뜯어 말렸을 것이다. 그 부모님에게 해당 학부모들은 다만 자식을 사지로 몰아낸 가해자일 뿐이다. 교육에 기역자도 모르지만 교육 현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해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앞서 말했듯 자식도 조카도 없고 교육도 모르기 때문에 반박시 제가 틀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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