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동료이긴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일을 시작한 지 1-2년차의 응애들이었다. 한 명은 회사를 옮겼고 다른 한 명은 같은 회사에서 여전히 근무중이라고 했다.
그들이 전해준 근황에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것도, 너무 당연해 놀랍지 않은 소식도 있었다.
직장생활 6년만에 처음으로 엄마에게 눈물을 쏟아낸 날로부터 10개월 후에는 회사를 나왔다. 10개월 사이에 일종의 무력감을 경험했고 연약한 세계가 침범 또는 파괴되는 것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아무래도 요즘은 내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되는데 나를 서술할 때 일의 영역을 빼놓고는 완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이를테면 나의 효용에 대한 문제.
일을 하다보면 날카로운 재능이 빛을 발하는 구간이 존재했다. 투입하는 시간의 총량으로 해소되지 않는 절대적인 구간에서는 첨예한 재능으로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짚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잘 하기 위해 필연적인 과정인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개인을 두고 보면 곧잘 발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언제나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갈증보다는 나라는 사람의 쓰임이 충분하지 못하면, 그래서 한 사람 몫을 해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쪽에 조금 더 가까웠다. 나에게도 유난히 내가 탁월하게 쓰이는 영역이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해내는 일의 가치는 언제나 매달 받는 임금을 상회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어디에서건 무임승차를 하고싶지 않아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해야할 일과, 말과, 태도를 준비해야했다.
그것은 일을 대하는 나의 예의같은 것이었는데, 그런 예의가 그간의 나를 보호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나의 어떤 면면을 드러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아무리 비뚤어져봐야 나는 나 아닌 다른 것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