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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히어로

by 솔라담




1. 빛과 그림자


촤악-!
도심 한복판에서 거대한 촉수가 빌딩을 휘감았다. 뚝뚝 떨어지는 해양 괴물 크라켄의 점액질은 아스팔트를 녹이며 시큼한 악취를 풍겼다.

"일렉트라, 촉수를 노려줘!"

은빛 슈트를 입은 검은 피부의 여성이 풍성한 금발을 휘날리며 두 눈을 번쩍인다. 곧 하늘을 가른 번개가 작렬하며 괴물의 촉수를 까맣게 태웠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

단말마의 괴성을 내뱉으며 촉수가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초원부족 명궁의 후예라는 실버칸의 화살촉이 괴물의 양 눈을 동시에 꿰뚫었다.

순간적인 암흑에 빠진 크라켄이 광란하듯 몸부림쳤다. 그 혼란의 중심으로, 붉은 갑옷의 아이언엑스가 질주해 왔다. 제 몸보다 커다란 도끼, 도끼라기엔 차라리 거대한 철판처럼 보이는 그것을 들고서.

콰앙! 아이언엑스가 다리의 제트엔진을 가동하며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며 힘껏 도끼를 뒤로 당긴 자세. 사람들이 '초승달 자세'라 부르는 그의 시그니처였다.

공중에서 다시 한번 터져 나온 제트엔진의 추진력으로, 그의 몸은 지상을 향해 운석처럼 내리 꽂혔다. 그 거대한 도끼 위로 일렉트라의 번개와 실버칸의 화살이 다시 한번 힘을 보탰다.

세 영웅의 합동 공격은 완벽했다. 괴물은 검은 먹물을 피처럼 튀기며 마침내 거대한 몸을 쓰러뜨렸다. 도끼를 치켜들며 일어나는 아이언엑스. 가슴의 초승달 장식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시민 여러분! 우리의 히어로가 다시 한번 해냈습니다!"

앵커의 흥분된 목소리와 함께 도시 전체가 함성으로 뒤집어졌다. 화면 가득 잡힌 영웅들의 뒷모습. 아이언엑스가 등 뒤로 손만 내밀어 엄지를 치켜세웠다.


TV 뉴스에서는 아이언엑스를 필두로 한 히어로 군단이 심해의 괴수 '크라켄'을 물리쳤다는 소식으로 종일 떠들썩했다. 앵커는 상기된 목소리로 한동안 평화가 이어질 것이라 외쳤다.

패널로 나온 한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요즘 괴수의 출현 주기가 빨라지고 있다며 신중론을 펼쳤지만, 그 목소리는 온종일 이어진 찬양 속에 금세 묻혀버렸다.




같은 시간, 히어로 타워 25층 장비 격납고의 시계는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해양 괴물들은 이 먹물이 문제야. 진짜 안 지워져."

아이보리색 전신 방호복을 입은 특수청소부 '준'은 특수 제작된 세척액을 걸레에 묻혀 아이언엑스의 붉은 슈트에 들러붙은 검은 점액을 닦아내고 있었다. 역한 비린내와 먹물 냄새, 정체 모를 살점에서 풍기는 악취에 독한 세제 향이 뒤섞여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상의 환호 뒤에 가려진, 영웅들의 더러워진 뒷모습을 정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어릴 적에 말이야, 난 꿈이 기사였거든? 화려한 갑옷을 입은."

지루한 근무를 달래려 옆자리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그 얘기 지겹다, 임마. 전투 후엔 갑옷 속이 똥오줌 천지였다며. 하하."

"그래. 결국 기사는 못 되고 갑옷이나 닦는 종자가 되긴 했지만, 뭐... 꿈에 가까운 일인 것 같아서 웃기지 않냐."

농담을 나누며 슈트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아이언엑스의 가슴 장식 틈새에 낀 점액질을 면봉으로 파내고, 일렉트라의 날개 관절 사이사이를 섬세한 브러시로 문질렀다.

"이 먹물은 진짜... 아무리 닦아도 끝이 없네."

네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그는 비로소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영웅들의 슈트는 언제 더러웠냐는 듯 본래의 광채를 되찾고 있었다.




도심에서 차로 30분. 급성 폐렴으로 요양이 필요한 아들 '노아'를 위해 이사 온 초원 속 오두막 같은 집.

"아빠!"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이언엑스 인형을 든 아들 노아가 쏜살같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오늘 아이언엑스 봤어? TV에서 봤는데 진짜 멋있었어!"

"하하, 그럼. 아빠는 아주 가까이서 봤지. 아이언엑스가 그 초승달 자세에서 거대한 도끼로 괴물에게 내리찍는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준이 본 것이라곤 먹물과 체액에 뒤덮인 슈트뿐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반짝이는 눈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괴물이 쓰러질 때 그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너 그 괴물의 먹물이 어떤 냄새인지 알아? 코가 마비될 것 같고, 또 얼마나 끈적거리는지... 이건 아빠 말고는 TV로 본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비밀이야."

아들은 아빠와 단둘만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 꼬마영웅처럼,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평화로운 한 달이 지났다. 가벼운 청소와 히어로 슈트의 유지보수 등으로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부우우우우우웅-!"

도시 근교 산어귀에 거대한 벌집이 나타났다. 장수말벌의 외형을 한 '퀸 베스파'와 그녀의 드론 군단이었다. 여왕벌은 사람의 몇 배 크기에 비행능력까지 있지만, 일벌인 드론은 7, 8세 어린이만한 크기다. 하지만 2족 보행이 가능하고, 낫과 같은 턱과 어린이 팔뚝만한 독침은 군인들조차 상대하기 벅찬 위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론들의 비행 능력이 거의 없다는 점. 날갯짓은 뛸 때 가속력을 보태는 수준일 뿐, 하늘을 날지는 못했다. 만약 저들이 제대로 하늘을 장악했다면 정말 재앙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피해가 커지기 전 히어로들이 도착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퀸 베스파의 페로몬을 이용한 군단 지휘는 절묘했고, 아이언엑스와 실버칸의 막강한 화력도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는 무력해 보였다. 그러나 영웅은 영웅이었다. 아이언엑스가 드론 군단을 도륙하며 길을 여는 사이, 퀸 베스파의 시선이 그에게 완전히 팔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날아든 실버칸의 화살 수십 발이 여왕의 몸 주변으로 향했고, 타이밍에 맞춰 떨어진 일렉트라의 벼락이 화살들을 전도체 삼아 오가며 퀸 베스파의 신경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땅으로 추락한 여왕은 아이언엑스의 도끼를 피할 수 없었다. 남은 잔당은 히어로와 군인들의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다.

TV는 다시 한번 히어로의 활약을 찬양했지만, 흩어진 드론 백여 마리에 대한 주의 기사도 다뤘다.

여왕과 벌집을 잃었기에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하루 이틀이면 자연 소멸할 것이라는 전문가의 인터뷰. 다만 그동안은 외출을 조심하라는 당부가 덧붙었다.



히어로 타워로 복귀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이언엑스가 말했다.

"젠장, 이 페로몬 냄새는 빠지지도 않겠는데. 이참에 신형으로 바꿔야겠어."

낮고 단단한 전형적인 군인의 목소리.

"맞아, 특히 넌 정면에서 뒤집어썼으니까. 그나저나 저번에 먹물 좀 묻었다고 폐기하지 않아서 다행인데? 하하."

일렉트라의 경쾌한 대답에, 항상 진지한 표정의 실버칸은 말없이 화살촉을 닦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은 슈트 청소가 취소되고 폐기를 하게 되어 비교적 업무 강도는 낮았다. 기본적인 청소를 끝내자 작업반장이 준을 불렀다.

"준. 오늘 폐기 처리는 자네가 좀 해 주게. 가능하지? 그리고 내일 휴가라며?"

"네, 오늘부터 아내가 출장을 가서 내일은 제가 종일 아이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야근 교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몸이 아프면 특히 아빠와의 추억이 중요할 테니까 잘해주고. 근무 교체 대신 부탁하는 거니까 폐기 처리 좀 꼼꼼하게 해 줘."

준은 폐기 예정인 슈트들을 정리하다가, 아이언엑스의 가슴 장식을 보았다. 붉은 갑옷 한가운데 번쩍이는 금빛 초승달 장식. 전투의 흔적으로 흠집은 갔지만, 여전히 영웅의 심장처럼 느껴졌다. 늘 영웅의 빛나는 모습 뒤에 남은 잔해와 오물만을 마주하던 그였다. 오늘따라 유독 기침을 하던 노아의 수척한 얼굴이 떠올라서였을까. 빛나는 영웅의 일부를 직접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것은 늘 그림자 속에 머무는 자신을 위한 작은 보상이기도 했다.

'그래. 내가 그림자 노릇 한 게 얼만데. 이 정도야... 노아가 얼마나 좋아할까.'

특히 오늘은 드론 잔당 수색을 위한 경비대의 출동으로 타워의 보안이 허술해진 날. 준은 폐기용 소각로 앞에서, 손바닥만 한 가슴 장식을 몰래 작업복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날 저녁, 준은 아내가 없는 이틀간 노아를 챙겨 줄 준비물을 마트에서 산 후 아들과 함께 하원했다. 주위 꽃나무가 만개해서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벌이 많이 날아다녔다.
저녁 시간, 준의 집은 노아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우와! 아빠 최고! 진짜 아이언엑스 갑옷 장식이에요?"

"그럼. 아빠가 노아 주려고 특별히 부탁했지."

평소보다 무거운 거짓말이 가슴을 짓누른다.

노아는 보물처럼 가슴 장식을 받아 들고 자신의 책상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2. 우리 집의 영웅


다음날 아침, 준은 이상한 소리에 침대에서 깨어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귀가 이상한가..."

우우웅, 우우웅. 불길한 저주파 소음이 집 전체를 흔드는 듯했다.

"아빠, 이게 무슨 소리야?"

눈을 부비며 일어난 노아가 물었다. 아이까지 들린다니 이명은 확실히 아니다. 근처에 공사가 있나? 준은 커튼을 걷고 창밖을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수십 마리의 드론들이 집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왜 드론이... 설마...'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비상호출 버튼을 눌렀다.

[신호 수신 완료. 20분 내 요원 도착 예정.]

곧이어 반장에게 다급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준! 혹시 너 옷에 페로몬이라도 묻은 거 아냐? 어제 폐기 시 방호복 제대로 입은 거 맞아? 일단 어떻게든 20분만 기다려! 최대한 빨리 출동해 달라고 내가 간청하고 있으니까!]

'젠장... 가슴 장식에 페로몬... 생각을 못 했다...'

20분. 그는 노아를 조용히 안아 지하실로 향했다.

"노아야, 아빠랑 영웅 놀이하는 거야. 아이언엑스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절대 나오면 안 돼. 약속!"

아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보다 '영웅 놀이'란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하실 문을 닫고 서둘러 문제의 가슴 장식을 집어 들었다.


준은 장식을 들고 화장실로 달려가 욕조에 던져 넣었다. 그 위에 선반에 있던 온갖 종류의 세제를 쏟아붓고 물을 틀어 거품을 낸 뒤, 청소용 스프레이폼으로 문틈을 꼼꼼하게 메웠다. 일단 냄새의 근원지를 차단했다.

"이제... 맞아. 냄새로 교란을 해야 해."

준은 벽난로에 장작 두어 개를 던져 넣고 불을 붙였다. 이내 그는 선반에서 가루 세제 한 통을 집어 들고는 마치 눈을 뿌리듯 불 위로 쏟아부었다. '촤아-' 하는 소리와 함께 가루가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매캐한 비누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그는 솔향이 진하게 나는 바닥 세정제 원액의 뚜껑을 열어 장작 위로 빙 둘러 뿌렸다. 끈적한 액체가 장작에 스며들자, 역한 비누 냄새에 머리가 아플 정도의 인공적인 소나무향이 뒤섞여 굴뚝을 향해 맹렬히 솟구쳤다. 콜록, 콜록. 지독한 냄새. 하지만 지금은 유독가스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굴뚝 밖으로 퍼지는 연기가 잠시라도 벌들을 교란시키길 바라며,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떠올려야 해, 떠올려야 해!'

벌을 유독 싫어하던 아내가 집에 벌이 못 들어오게 준비한 것들이 있었다. 일단 석유. 하지만 그건 집 밖 창고에 있다. 그리고 허브. 아내가 벌을 쫓기 위해 사 둔 말린 허브들과 식용 허브차까지 전부 프라이팬에 태워, 연기가 밖으로 통하는 모든 문과 창문 앞에 뿌렸다. 창밖을 보니 혼란이 온 듯 드론들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후..."

그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바깥의 날갯짓 소리는 여전히 낮게 울리고 있었다. 단 몇 분, 아니 몇십 초의 숨 고르기일 뿐.

잠시 숨 고르기도 사치였나. 마치 거대한 쥐가 나무를 갉아먹는 듯한 소름 끼치는 '까드득, 카가각' 하는 소리가 화장실 쪽 벽을 뚫고 들려왔다. 아무리 차단하려 해도, 퀸의 페로몬에 대한 녀석들의 후각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대로는 5분도 버티지 못한다. 그는 아이언엑스 인형을 들고 아들이 숨은 지하실로 달려갔다.

"노아야! 이 인형 손에 꼭 쥐고, 여기 버튼 눌러서 나오는 주제가 다섯 번만 듣고 있어. 알았지? 그동안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나오면 안 돼! 아까 말했지? 아이언엑스가 문을 열어줄 거라고."

노아에게 씩 웃어 보이고 볼에 입맞춤을 한 그는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그 사이 굳은 스프레이폼을 뜯어내고 세제 거품으로 범벅이 된 가슴 장식을 다시 꺼내 들었다. 수건 하나를 집어 들어 알코올을 묻혀 가슴 장식을 한번 훑었다. 심장은 터질 듯 뛰었지만, 머리는 차가웠다.

'미끼는 나다.'

그는 드론들이 없는 쪽 창문을 의자로 후려쳐 박살 냈다. "와장창!" 소리에 놈들이 주춤한 사이, 그는 가슴 장식을 든 채 밖으로 몸을 날렸다. 페로몬을 묻힌 수건은 반대쪽으로 던지고, 마당 끝 창고로 달렸다.

필사적으로 창고에 도착해 가슴 장식을 안으로 던져 넣고 석유통을 들고 나와 창고 주위에 원을 그리며 뿌렸다. 수건에 밴 페로몬 때문인지 잠시 혼란에 빠졌던 드론들이 정신을 차린 듯, 일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우우웅-"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원을 그리던 석유를 그대로 바닥에 부으며 최대한 달려가 석유의 길을 만들고, 드론들이 어느 정도 따라왔을 때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우리 아들한테서 떨어져, 이 괴물들아!"

석유 길 위로 라이터를 던지고, 그는 죽을힘을 다해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퍼어엉-!"

창고 안의 인화성 청소 약품들에 불이 옮겨 붙으며 생각보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일시적으로 모든 드론이 폭발한 창고에 시선이 팔렸다. 그 사이 그는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주님 제발 살려주세요.'

문득 찾아온 정적에, 날 놓친 건가? 라는 헛된 희망도 잠시뿐. 기적은 없었다. 저주파의 끔찍한 소리가 다시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웅-"

끔찍한 죽음의 소리. 독침에 찔리기보단 낫 같은 턱에 썰리는 게 나을까. 뭐가 덜 고통스러울까. 참나, 이딴 생각이 내 마지막이라니.


"퓌유우웅."

독수리의 울음처럼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턱을 있는 힘껏 벌린 드론의 아가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노아와 아내의 얼굴이 스쳐 갔다. 사랑해. 정말.


"퓨슉-!"

무언가 터지는 소리. 눈을 뜨자, 실버칸의 화살에 머리가 터져나간 드론의 잔해가 보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맞다. 실버칸의 화살 소리였구나...

심장을 옥죄던 긴장이 턱 풀리며 무릎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멀리서 일렉트라의 번개가 남은 드론들을 태우는 모습을 배경으로, 아이언엑스가 노아를 안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

노아가 아이언엑스의 품에서 뛰쳐나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아들은 옆에 서 있는 진짜 영웅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를 끌어안은 채 엉엉 울었다.

아이언엑스가 다가와 두 사람을 자신의 커다란 팔로 함께 안아주었다.

"꼬마야, 오늘 너를 지킨 건 우리가 아니야. 네 아빠가 진짜 영웅이란다. 많이 응원해 드리렴."




며칠 후, 자정 무렵.

무단으로 가슴 장식을 가져간 일로 경위서를 쓰고 정말 험한 날들을 보냈다. 다행히 드론 잔당 소탕에 기여했다는 히어로들의 탄원 덕에 해고는 면했다.

야근이라 둘러대고 야간 조사를 마친 후 늦게 귀가한 준은 조용히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곤히 잠든 아들의 이마에 뽀뽀를 하고 나가려는데, 침대 머리맡의 스케치북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영웅'이라는 제목 아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누구지? 아이언엑스는 아닌 것 같고... 저런 슈트를 입은 히어로가 있었나? 하얀색 통짜 갑옷? 방독면?

아... 내 방호복이구나... 전에 보여준 적 있다. 아빠가 일할 때 입는 옷이라고...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준은 소매로 눈가를 훔친다. 그래. 기사라는 꿈. 나도 나름 이뤘구나.


"이 맛에 산다. 이 집에선 내가 가장 멋진 기사이자 영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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