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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itaryfantasy Feb 19. 2017

1. 어떻게든 되겠지

의 배신에 관한 이야기

  




 나는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로 자랐다.

엄마와 아빠는 많은 일들을 날 위해 해주셨고 집안일은 맞벌이셨던 부모님을 대신하여 할머니께서 도맡아 하셨기에 나는 매일 차려진 밥을 얻어먹고 빳빳하게 잘 개어진 옷과 양말을 서랍에서 꺼내 입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난 웬만한 일은 엄마 아빠께 부탁했다. 살 게 있으면 사다 달라고 했고 내가 해결하기에 조금만 버거울 것 같은 일이 생겨도 금방 도움을 청했다. 그때까지 난 누구보다 도움받는 것에 익숙했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대학생이 되었다. 과분한 자유시간과 내게 주어진 수많은 선택권들은 나를 무척 당황하게 했다. 나는 그런 선택권들이 마냥 좋지 않았다.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하여 헤쳐나가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반드시 선택은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매일매일 무언가를 고르고 골랐다. 수업을 갈지 놀러 갈지, 지금 할지 내일 할지, 이 수업을 들을지 저 수업을 들을지, 매일 나는 내게 주어진 옵션을 하나씩 선택해 나갔다. 그러다 내 결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조금 노력하는 척하다가 이내 이렇게 생각했다.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실제로, 어떻게든 됐다. 그게 어떤 문제가 됐든, 인생이 망하는 법은 없었다. 꼬인 실타래에 마음이 답답해 엎드려 자고 일어나면, 누가 풀어놓은 것처럼 매듭이 느슨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매사에 크게 걱정하는 법이 없었고 문제가 생겨도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10대와 20대의 절반 가량을 보내오면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을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함부로 써먹었던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는 쿨한 내 성격의 장점이라고 은근슬쩍 자위도 하면서 말이다.



 그 생각이 처참하게 깨졌던 시작은 2014년, 교환학생으로 떠난 프랑스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사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과 친구들을 떠나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게 된 것에 무척 들떠있었다. 빨리 언어를 익혀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내 방을 예쁘게 꾸며 놓고 아침마다 바게트를 사다 먹을 생각으로,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고 에펠탑 옆 공원으로 피크닉을 갈 생각으로 머리통이 이미 꽉 차 있었다. 다른 귀찮은 것들을 미리 준비하는 일은 그 상상에 물들어 자꾸만 핑크빛이 되어버리곤 했다.(전혀 안 했다는 뜻) 그때의 난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난 내 형편없는 불어 실력과 위기 대처능력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이 때까진 행복했음

그렇게 출국일은 다가왔고 나는 캐리어 두 짝과 꽉 찬 배낭 하나를 매고 영국항공 이코노미 석에 몸을 실었다. 경유를 포함하여 거의 스무 시간 가까이의 시간이 흐른 뒤 나 홀로 첫 비행이 드디어 끝이 나고 공항에서 짐을 찾았을 때, 그때부터 난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낯선 땅에서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있었다. 



짐 세 덩이를 가까스로 끌고 기차표를 사기 위해 씩씩하게 TGV 탑승권을 파는 매표소로 가서 미리 체크해 온 시간대의 표를 요청했으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기차가 세 시간 정도 연착되어 나는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샤를 드골 공항을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살게 될 동네에 어렵사리 도착했을 땐 이미 버스도 인적도 끊긴 조용한 새벽이었다. 그때가 프랑스가 뒤숭숭한 시기여서 그랬는지, 기차역에는 총을 둘러매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군인들이 무서운 표정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재채기라도 했다간 나를 엎어뜨리고 내 가방을 검색할 기세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 시선을 피하며, 나는 황급히 택시를 잡았다. 예정에 없던 새벽 택시가 조금 무섭긴 했으나, 그보다 더 문제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보여주는 주소로 찾아가지 못하는 기사 아저씨였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우린 차를 대놓고 한참을 지도 위에서 검지 손가락을 움직여댔고,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 역에서 차로 십분 걸린다는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미안해하며 극구 내게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선물용으로 가져간 부채를 드렸더니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기쁨에 서둘러 기숙사로 들어가려는데, 절망스럽게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기숙사 카드를 찍어야 문이 열리는 구조인 듯했으나 나는 아직 카드도 받지 못했고, 이 새벽에 누가 드나들 리도 없었을뿐더러 오자마자 프랑스 통신사로 개통할 생각으로 로밍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에 호텔을 찾아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양 손으로 끌면 각자 자기주장을 하며 서로 반대쪽으로 굴러가는 캐리어를 들고 이 돌길을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놓고 갔다가는 도둑맞을 게 분명했다. 난 그렇게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덜컹, 꾹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한 남자애가 한 손에 담뱃갑을 들고 나왔다. 반가움에 달려가서 내 사정을 설명하자, 그 아이는 담배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내 가방을 들어 3층까지 올려주었다. 내 방 키를 가지고 있는 기숙사장이 지금 기숙사에 없을 거라며 그는 나 대신 기숙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 사정을 이야기한 뒤 방 열쇠를 가지고 와줄 것을 부탁해주었고, 멀뚱멀뚱 서있는 나에게 뭐라도 좀 먹으며 편하게 기다리자며 자신의 방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나도 좀 앉고 싶긴 한데.. 방금 처음 봤는데 이렇게 막 방에 가도 되는 건가? 새벽인데? 가도 되나? 갖은 생각을 다하며 따라 들어간 그 아이의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침대 끝에 거의 꼬리뼈만 걸치 듯 앉아있는데 바로 그 때, 그 애가 뒤에서 살며시 어깨를 잡았다.                                                      


"엄마약!!"


놀란 게 민망해서 괜히 사진만 삼십장 정도 찍었다.

그리고는 배고플 텐데 먹으라며 감자칩을 건네주었다..(그 친구는 그 이후 종종 만날 때마다 내 엄마약을 따라 하곤 했다.)

어쨌든 그렇게 삼십 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기숙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만나서 기차가 연착되어 늦게 되었다며 사과를 하고 열쇠를 받았다. 기숙사장과 같이 온 친구들은 무척 친절하게 나를 환대해주었다. 이것저것 기숙사 룰에 대한 설명도 듣고 팁도 듣고, 내가 쓰게 될 방에 함께 들어와 라디에이터가 잘 켜지는지 체크까지 마치고 나서야 모든 해야 할 일들이 끝이 났다. 메르시, 메르시보꾸, 연신 인사를 하며 생글생글 웃어 보이고는 문을 닫는 동시에, 인사하던 손을 내릴 새도 없이 그 상태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떻게든 되고 나니 새벽 세시 반, 드디어 이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과 이 곳엔 정말 나 혼자라는 막막함. 여기까지가 프랑스에서의 첫날이었다.



 그다음 날 아침부터 그곳에서의 내 생활은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원피스고 나발이고 공동 세탁실에 자리부터 맡는 게 문제였다. 안 빤 원피스를 입고 피크닉을 갈 수는 없으니. 빨랫감이 가득 쌓인 빨래통을 안고 세탁실로 가면, 세 대가 전부인 세탁기는 이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누군가의 빨래를 힘차게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방에 갔다가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다시 가보면, 또 다른 새로운 누군가(나보다 부지런한)의 빨래를 돌리고 있는 거였다. 몇 번 그런 식으로 세탁실에게 거절을 당하고 방에 돌아오자 시간은 이미 잘 시간을 훌쩍 넘겨 있었다. 아 졸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습관처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전혀 어떻게 되지 않은 빨랫감과 입고 나갈 옷이 한 벌도 없는 무시무시한 옷장이 내 앞에서 나를 비웃고 있었다. 

폭발할 것 같은 빨래통


대걸레를 조립하며 

난 이 곳에 오면 내가 저녁 파티에 입고 갈 옷 같은 걸로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 짜증 나게도 일주일째 내 생활의 화두는 내 방바닥이나 세면대 수채 구멍 같은 것들이었다. 신발을 신고 다닐 것인가 맨 발로 다닐 것인가. 신발을 신고 다니면 편하긴 한데 바닥에 먼지를 쓸어 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라 대걸레를 사야 할 것 같아. 대걸레는 어디서 사지? 공동주방에 싱크대를 누가 쓰고 있을 때가 많아서 방에 있는 세면대에서 채소를 씻어 버릇했더니 뭔가 물이 

 

흐뭇

느리게 내려가는 느낌이다.. 어떡하지? 이때의 난 매일 다양하게도 펼쳐지는, 생전 대면해본 적 없는 미치도록 사소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일에 고군분투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사실 귀찮아서 안 하고 그냥 넘긴 적이 훨씬 많았지만, 그다음 날 돌아오는 것은 세면대의 역류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결과들이었다. 누가 치워줄 사람도 없었다. 또 바닥에 걸레질을 하지 않으면 자꾸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났기 때문에, 나는 생존을 위해 적합한 대걸레를 찾아다녔다. 어쨌든, 난 이제 더 이상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말을 내뱉을 수 없게 되었다.

(오른쪽에 사진은 대형 마트에서 사 온 대걸레로 방 안을 구석구석 닦아내고 더 이상 기관지가 고통받지 않는 느낌을 받았을 때 찍은 인증샷인데, 에펠탑 앞에서 찍은 사진보다 더 진한 기쁨이 녹아있다.) 





 한 번은 크게 아팠던 적이 있다. 감기 몸살이 점점 심해지면서 열도 끓고 목이 많이 아팠다. 한국에 있을 때도 웬만하면 병원에 잘 가지 않았지만 여긴 특히나 진료비가 비싸기 때문에 하루정도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 내 방 침대에 온종일 누워만 있었는데도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빵은 넘어가지 않고 죽이라도 좀 먹고 싶은데 마침 쌀도 떨어졌고, 약국에서 사 온 약은 효과도 없는 것 같았다. 기침을 너무 많이 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따끈따끈하게 달궈진 몸으로 기력 없이 침대에 누워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한국에 있을 땐 병원에 가지 않아도 하루 이틀 쉬면 나았는데.. 왜 낫지 않는 거지?

그러다가 또 어떤 장면들이 떠올랐다. 삼시 세끼 입에 떠 넣었던 새우죽, 식후에 먹던 감기약, 달콤한 해열제, 내 머리 위에 언제나 차가운 상태로 올려져 있던 물수건, 감기가 거의 떨어질 때쯤 엄마가 해주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저절로 나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불쑥 내 머리를 때렸다. 또 습관적으로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꽁꽁 싸맸다. 찬바람을 맞지 않도록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양말 위에 수면양말까지 껴 입은 뒤 장바구니를 장착하고 기숙사에서 삼십 분가량 떨어진 아시안마트로 빠르게 걸었다. 5kg짜리 쌀을 사고, 전에는 비싸서 망설였던 돼지불고기 소스와 봉지 칼국수도 샀다. 쌀은 평소에 사던 것 말고, 호랑이가 무섭게 그려진 타일랜드 쌀이 마음에 들어서 그걸로 샀다. 그때 심정이 그렇게 패기가 넘쳤다. 너 이런 식으로 애기처럼 살다 간 내일모레쯤이면 옹알이를 하게 될 거야! 속으로 그렇게 열 받아서 소리치며 마트까지 걸어가다 보니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게 저 타일랜드 호랑이 쌀이었다.(맛도 있어서 다음부턴 저걸로 정착했다.)


약국 문도 비장하게 열었다. 원래 대충 말하고, 대충 알아들은 척하고, 주는 거 대충 받아오는 게 내 캐릭터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약사 아주머니와 얼굴을 비교적 가까이하고 필사적으로 내 상황을 설명했다. 저번에 준 그게 효과가 없었어요, 좀 더 강한 걸 주세요. 아주머니가 내 말을 다 알았다는 확인까지 받아가며 내 요구사항을 차근차근 설명하자, 그 분은 조금 더 적극적이 되어서 내 열을 재고 해열제까지 처방해주셨다. 알고 보니 열은 40도까지 올라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곧장 침대와 가구를 다 들어내고 먼지를 털고 대걸레질을 했다. 신발을 신고 생활을 하다 보니 청소를 해도 닦이지 않은 구석구석에 쌓인 먼지가 내 목을 더 아프게 한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열은 펄펄 끓었지만, 내가 아니면 아무도 날 대신해 이런 일들을 해주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도 되지 않을 일이었다. 청소를 마치고 밥을 하고, 혼신의 돼지 불고기를 만들었다. 다 먹고, 약을 먹고, 씻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내 일들이 어떻게든 될 수 있었던 건 그 일들이 저절로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나를 도와줄 누군가의 존재에 내가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내가 최악의 상황으로 가지 않도록 나를 도와줄 사람들의 존재가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우여곡절 끝에 두 달만에 발급 받은 체크카드가 좋아서 사진을 열 장 정도 찍어두었다.

 그 후 나는 그곳에서, 그리고 또 익숙해진 그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떠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계속해서 나와 싸워댔다.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낯선 곳에서 나는 무언가 잘못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열심히 챙겨야 했다. 남들보다 배로 외롭고 남들보다 배로 힘든 것 같았다. 그냥 단순하게 생활을 영위하는 사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뭐하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었다. 주택 보조금이 턱없이 부족하게 책정된 이유를 알아내 그에 맞는 서류를 준비해 가서 창구 직원과 몇 시간씩 씨름하는 일, 볼 일이 있어 갈 때마다 새로운 서류를 가지고 다시 오라는 통보만 하는 은행을 인내하고 계속 찾아가는 일 등이 그때의 나에겐 그 날 넘어야 할 퀘스트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크고 작은 퀘스트를 완료하고 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가 된 것 같았다. 그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인간으로서의 생존능력이 높아진 느낌이랄까? 그렇게 나는 익숙한 모든 것들을 떠나 몸뚱이 하나만 낯선 곳으로 던져지는 경험을 통해 매일 새로운 나와 대면해가며 조금씩 사는 능력을 키워갔다. 전혀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멋지지 않은, 자질구레하고 사소하며 언급하기조차 우스운 당연한 것들의 산을 나는 매일 조금씩 올랐다.













 처음 1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결심했을 때 난 막연히 그것이 지금 내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당장 미래가 막막한 나에게 어떤 해결책이 되어줄 같았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영화 같지 않았다. 내 고민과 불안에 대한 어떤 답을 던져주지도, 한밤중의 번뜩이는 깨달음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면 날이 저물고, 또 다음 날이 오고, 그 반복이었다. 익숙한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매일같이 펼쳐지는 다채로운 위기에 맞춰 나를 변화시키느라 그때의 난 삶의 의미 같은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쉬운 것 하나 없었던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내 인생에 다양한 모습의 나를 담은 컷이 많아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내 생각이랑은 조금 다른 인간이었다는 것을, 내가 모르던 새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경험인지, 어제와 오늘이 같은 색인 줄로만 알고 살던 내 삶에, 내일도 난 같은 색일 거라고 믿으며 살던 인생에 얼마나 큰 설렘을 불어넣어 주는지 말이다. 

그 설렘으로, 오늘도 다음 여행을 꿈꾼다. 다음 단계에 또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나를 기대한다. 내가 알던 나보다 더 강하고 솔직한, 생각하지 못했던 색깔의 나를 만나게 될 수 있기를, 오롯이 혼자 힘으로 거리를 누비는 빛나는 나를 또 만나게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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