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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지 Oct 20. 2024

꼼지락거리는 양손은 허무만 다시 헤집고

정우 - 1

도시를 통째로 지워 버리기라도 하려는 걸까, 이 안개는.


짙은 안개 속에서 정우는 차분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들이쉬고 내쉰다.

코 밑, 그러니까 인중에 집중해 봐요, 하는 명상 가이드가 들리는 듯하다. 콧김은 인중을 훑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 그러나 그 숨들은 매번 새로운 숨이고, 서로 다르다. 어느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한번 꺼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습관처럼, 정우는 코트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린다. 손에 잡히는 것은 코트 겉면과 달리 매끄러운 안감, 그리고 약간의 먼지나 모래알처럼 까끌거리는 무언가뿐. 그 이상의 뭔가가 만져지길 바라면서 주머니 속을 훑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꼼지락거리는 양손은 허무만 다시 헤집어 놓는 듯하다.


도시의 안개 속에서 흙냄새가 났다. 황사도 없는 날씨인데, 어디서 흙이 실려 왔을까. 특정할 수 없는 냄새에 몸이 떨린다. 은근히 추운 날씨, 그렇게 느끼며 그는 검은 목도리 속으로 고개를 숙인다. 턱, 입, 코가 차례대로 목도리 속에 자신을 감춘다. 목도리에 붙어 있는 솜털 탓에 얼굴이 간지럽다. 목도리 안에서 입김과 콧김이 감돌아, 조금은 답답하다.


그저 걷는다.


그는 자기 메일함에 남아 있는 편지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임시 저장된 메일. 그리고 그 메일을 기다리고 있을 한 아이를 떠올려 본다. 이제는 성년이 되었을 나이인데, 정우에 머릿속에는 단발머리의 초등학생이 그려질 따름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때 이후로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없으니.


정우는 그 아이의 모습을 하나씩, 선명히 새겨 본다. 목선을 넘지 않는 잛은 커트머리. 그와 눈이 마주치면, 정면으로 잠깐 마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꾸뻑 숙이는.그러면 정우도 민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민아는 딱 보아도 자기 몸에 맞지 않는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있다. 그 무게 탓에 배낭 끈과 민아의 어깨 모두 위태로워 보인다. 아이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응시하는 눈만 있을 뿐. 쌍커풀이 없는 눈, 아래로 처진 속눈썹 사이로 보이던 크고 까만 눈동자.


목적지도 없이, 그러나 추위만은 쫓아내려는 듯 빠르게 걷던 선우의 걸음이 점차 느려진다. 선명하게 되새기던 이미지가 옅어진다. 그의 양 눈썹 사이에 주름이 진다. 방금 그토록 눈에 보이는 듯 세세하게 그려지던 민아의 모습이, 기억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옅어진다.


그리고 가슴 깊이 누르고 눌러 온, 민아와 함께 딸려 올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한 아이의 이름. 사실은, 민아보다 그 아이를 떠올리고 그려 보는 게 먼저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의식하지 않았어도 정우는 이미 그 아이를 먼저 그리고 있었다.


수희.

그 아이는 한때 그가 가르쳤던, 또 가장 깊이 마음을 썼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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