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어리석어야 하는가
한 사내가 서점의 서가를 살피고 있다. 그는 곧 흥미를 끄는 제목을 발견하고는 눈을 멈춘다: "로베르트 무질, <어리석음에 대하여>" 사내가 이 책에서 기대했던 바는 아마도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정도일 것이다. 어쩌면 어리석음의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영특함, 더 나아가 지혜의 길이 제시되어 있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우리는 모두 뛰어난 존재들이다'라는 식의 감정 동화가 아니라, (로베르트 무질이라는 이름 때문에라도) 인문학적 소양에 근거한 뛰어난 성찰이 담겨 있으리라는 떨리는 기대를 했을 수도 있다. 사내의 아내가 이 책을 읽고 나면 꼭 소회를 들려 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그런 기대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취된 한 가지 기대는, 어리석음에 관한 로베르트 무질의 이 연설문이 상당한 인문학적 욕구를 충족 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빗나간 기대도 있었으니, 그는 이 연설에서 지혜는 물론, 올바른 행동이나 사고의 지침을 명확하게 언급할 생각이 없었다.
무질은 우선 어리석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서술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의 노력은 집요했으니, 어리석음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리석음은 불필요한가, 어리석음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최소한 어떤 자격을 가져야 하는가 등등의 문답을 계속 이어나갔다. 어째서 그는 불필요한 듯한 긴 서술을 남겼나? 하지만 이것은 그에게 꼭 필요한 사전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어리석다고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로 연설을 듣고 있는 청취자였고, 나치 정권을 탄생시킨 독일 국민이었으며, 수많은 국가의 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령 그의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무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설적인 말을 쏟아내면 대중이 자신을 적으로 여길 수도 있음을 알았다. "여러분들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치 정권 탄생에 일조했고,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지게 되겠죠. 다 여러분들 탓입니다." 수사학은 이런 식으로 운을 떼는 걸 가장 경계한다. 우리가 그 의미를 조금도 담고 있지 않음에도 연설 서두에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거나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마크 트웨인은 이런 수사법을 익살맞게 사용하여 명성을 떨쳤는데ㅡ국회의원은 멍청하다. 하지만 그 절반은 그렇지 않다ㅡ무질은 좀 더 겸손한 방식을 택했다. 그는 그 자신도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며, 어리석음으로부터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이론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인류에게 어느 정도의 어리석음은 항상 필요했다는 '전제'를 달았다. 이것은 그의 한 가지 우려와도 상통한다:
어리석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 사람은 본인은 어리석지 않다고 전제해야 하고, 따라서 본인을 영리하다고 여긴다는 것을 내보여야만 하는데, 물론 이렇게 하는 건 보통 어리석음의 표시로 여겨집니다!(211쪽)
그의 연설문, <어리석음에 대하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곧장 주제로 나아가지 않은 채, 청취자와 나중에 그의 글을 읽을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로 긴 서두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그가 처했던 시대 상황, 즉 그를 불순분자로 낙인찍고 그의 책을 불태운 뒤 출판금지를 걸었던 시국, 나치에 찬동했던 대중들이 보낼 화살, 그리고 자신을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벌여왔던 소모적 논쟁과 비난을 생각하면 그가 연설문을 작성하며 어떤 불안을 느꼈을 거라 가정해 볼 수 있다.
그가 이 연설문으로 시민들에게 어리석음의 위험성을 알리려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어리석음을 오직 부정적인 요소로 단정 지은 것은 아니다. 그는 때론 어리석음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연설문 <어리석음에 대하여>가 복잡한 전개를 보이는 것은 어리석음이 지닌 그런 이중적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로베르트 무질이 어리석지 않고 영리했다면 연설문을 이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영리했다면 권력에 영합하고 대중의 입에 맞는 글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리석었고 이런 연설문을 낭독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로베르트 무질은 어리석음이 내포하고 있는 그 두 개의 속성을 동시에 서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종종 아주 어리석은 인간들이 희생자 역할을 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쉽게, 잔혹한 사람들의 사냥감이 된다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이들의 무저항성이, 피 냄새가 사냥의 욕구를 부채질하듯, 거친 상상력을 부채질하고 황야로 유혹한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213쪽)
로베르트 무질은 자신의 긴 연설문 그 어느 곳에서도 '어리석은 인간들'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연설문은 당시 시대적 상황과의 연계를 피해가기 어렵고, 따라서 희생자 역할을 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란 인간의 이기심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정권(예를 들어 당시의 나치)에 농락당하고 있는 국민들을 가리킬 거란 암시를 준다. 이들은 자신들이 희생자인 줄 모르고 있으나 그 무저항성 때문에 잔혹한 사람들을 더욱 자극하고, 결국 사냥감이 되고 만다. 그런데 어리석은 희생자는 또한 로베르트 무질 그 자신이기도 하다. 결국 그는 공개 연설이라는 위험한 행동을 하고 말았고, 그리하여 마찬가지 방식으로 타락한 집단의 기회주의적 나팔수들을 자신의 황야로 끌어들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리석음은 그 행위의 주체에 가변성을 가한다.
<어리석음에 대하여>는 여전히 혼돈 속에 있다. 그는 마치 알아들을 수 있는 자만이 알아들으라고 외치는 것 같다. 이것은 그의 어리석은 행동이 끌어들일 승냥이 떼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책략이기도 하다. 어리석지 않게 살기 위해서 어리석은 짓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친 그는, 이제 어리석음의 가변성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정신병리학의 예시를 들고나온다.
한때 아주 유명했던 한 병리학 교과서에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다른 사람이 처벌받는 것!"이라는 답이 정신 질환의 사례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 이 질문과 답은 많은 토론되는 법 해석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233쪽)
결국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도 시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갈라지게 된다. 그에 따르면 어리석음엔 두 종류가 있는데, 그가 벌이고 있는 어리석음은 예술가적인 어리석음, 즉 '정직하고 단순한 어리석음'이다. 예를 들어 정신박약자는 우리가 '병상 곁의 의사'라고 간단히 표현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길게 묘사한다: "침대에 누워 있는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남자, 그 후 거기에 수녀가 한 사람 서 있다."(236쪽) 로베르트 무질은 그 문장을 보고 다음과 같이 놀라 외친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원시인의 표현 방법입니다!"(236쪽)
그는 이런 식의 버릇이 예술가에게도 있다고 주장한다(그가 쓴 연설문을 보라!). 그의 말에 따르면 정신박약자, 원시인, 예술가는 같은 선상에 놓이게 되며, 비슷한 어리석음을 공유하는 존재가 된다. "순진함과 높은 구체성, 고차원적인 표상들을 단순한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 잉여적인 것, 주변 상황들, 부차적인 것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 (...) 이것들은 문학의 아주 오래된 관행들입니다."(237쪽) 그는 자기가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지 통렬하게 비유한다.
"행동하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야만이라고 칭합니다." 로베르트 무질은 요한 에두아르트 에르트만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다. 행동하는 어리석음... 로베르트 무질은 어리석음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며, 또한 감정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그 문장이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두 개의 가치가 모두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세상은 야만성을 향해 움직인다. 그걸 막기 위해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어리석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리석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충분히 모든 근거가 완벽하게 마련될 때까지 모든 행동을 유보한다면 무질의 말마따나 세상은 경직될 것이다. 로베르트 무질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직 너머엔 더 위험한 것이 있다. 바로 다른 자들이 벌일 어리석음의 활보이다.
로베르트 무질의 연설문에서 문학의, 어쩌면 예술의 한 가지 의의를 예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예술가적 어리석음이 우리의 지성적 어리석음을 조망해주는 힘이 되리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