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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writes Jan 25. 2017

스톡홀름의 오후 3시

2015년 봄



     안녕, 꼬맹이. 오늘은 스톡홀름의 오후 3시에 대해 말해줄게. 그전에 요즘의 너에 대한 짧은 브리핑 먼저. 태어난 지 10개월이 지난 요즘의 너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다리로 마룻바닥을 디디고 서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하루 종일 종알거리는데, 안타깝게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네. 아주 조그맣게 속삭일 때도, 놀랄 만큼 커다랗게 소리를 지를 때도 있어. 그것을 한 음절도 놓치지 않고 전부 알아듣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너는 참으로 희한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늘 답답한 것은 엄마인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니 vice versa (봐이-스 붤-사: 거꾸로 생각해봐도 똑같겠지). 너 또한 내가 하는 말을 대부분 못 알아듣겠구나. 물 속에서 서로의 뻐끔대는 입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초보 싱크로나이즈 선수 콤비인 우리. 참 귀엽고도 답답한 커뮤니케이션의 날들이다. 하지만 지금이 참 좋아, 나는.


스톡홀름 시청사 너머의 광장. 해가 빛나고, 물은 더욱 빛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람들의 얼굴이 가장 빛난다.


     스톡홀름은 엄마와 아빠의 신혼여행지란다. 오슬로-베르겐-스톡홀름-탈린-헬싱키. 이렇게 다섯 개의 도시로 허니문을 떠났는데, 그중에서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도시가 바로 스톡홀름이야. 역사적으로 한 번도 서러운 눈물을 쏟아본 적이 없는 도시, 스톡홀름. 하지만 자신의 강하고 부유함을 보여주는 방식이 참으로 우아한 도시, 스톡홀름. 어깨에 힘을 가득 부풀려 놓는다거나, 무언가를 부술 기세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똑 떨어지는 깔끔한 미소로 자신이 얼마나 여유로운지를, 그래서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도시였어. 그래서 그런지 스톡홀름을 채우고 있는 공기와 물빛 그리고 거리의 작은 티끌까지도 찬란하게 빛이 났단다. 사람으로 비유를 하자면, 키가 크고 피부와 옷매무새가 깨끗한, 그리고 인생에서 고단했던 적이 한 구절도 없이 성장한 아가씨를 보는 것 같았단다.


붉은 벽돌 앞으로 흐드러진 나무. 그 아래 두 사람. 스마트폰 삼매경이겠지만, 내 눈엔 그저 그림같으니 이것도 찬란한 착각.


     스톡홀름 골목에서 만난 그곳의 사람들도 물론, 내 눈에 한없이 좋아 보였단다. 저 푸른 눈으로는 무엇을 응시해도 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감상하듯 차분하고 우아하겠구나. 저 곧고 단단한 어깨를 들썩이며 쏟아내는 낯설고 신비한 언어는, 어떤 굳은 마음이라도 금세 설득해내는 노래 가사 같겠구나. 이렇게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 만으로, 나는 그들의 일상 전체에 대한 단단한 착각에 빠져버렸어. 이것은 아마도 여행자가 현지인을 들여다볼 때 생기는 특유의 색안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난히 빛이 좋은 오후 3시의 거리에서 단 5초 정도 마주친 그들을 보며 내 멋대로 상상해버리는 그들의 일상이란. 내가 사는 꼬질꼬질한 서울의 시간들과는 달리 낭만과 우아함으로 뻥튀기된단다.


굽이 굽이 찬란한 착각들이 가득한 스톡홀롬. 그 오후 3시의 골목들.


     그런데 그게 말이야. 사실은 멀리 떠나지 않아도 여기 서울에서, 나의 동네에서, 나의 학교나 회사에서도 아주 흔히 있는 일이야. 다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로 살아보질 않아서, 남들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엄마는 종종 그랬어. 서른이 된 지금도 그래. '여기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멋지게 사는구나...' 하고 나를 착각에 빠뜨렸던 스톡홀름의 찬란한 오후 3시처럼, 살다 보면 유난히 나보다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가 있단다. 이를테면 카페에서. 늘 그렇듯 아메리카노를 주문을 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페퍼민트 한 잔이요'라고 맑고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올려다 보니,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에 매력적인 얼굴을 한 또래의 여자가 서 있을 때. '와, 저 사람은 참 우아하다. 메뉴도 셔츠도 구두도 근사하고... 깨끗하고 상큼한 페퍼민트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인가보구나.'라고 느끼고는 마치 드라마를 쓰듯이 상상을 끌고 멀리 달려가게 되지. 그러다 보면 그 낯선 여인은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게 분명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심지어 어느 우울한 밤에는 '아, 부럽다.'라는 결말에 서 있기도 해. 참 웃기지 않니? 어쩌다 고작 20초 정도 관찰한 사람인데 말이야. 


창가에 올려진 화분 하나도 엄마의 상상을 달려보내기에 충분한 출발선이지.


     너도 사춘기 무렵이 되면 느낄까. 짧게 스쳐가는 낯선 사람들의 모습에 나의 일상을 비교하며, 꼬르륵 소리가 나는 마음 한 구석을 움켜쥘 때의 허기짐을. 아마도 교실에서, 지하철에서, 여자 화장실에서, 혹은 거리에서 이런 일이 꽤나 있을 거라 생각된다. 지금 되돌아보면 웃음이 날 정도로 사소하지만, 또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걸 보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그 마음 속 시장기에 대해 너에게 솔직히 나열해볼게. 9살 때, 같이 바이올린을 배우던 친구의 손가락 마디가 참 그럴듯하게 굽어있었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두껍고 못생긴 내 손보다 훨씬 예뻐보였으니까. 15살 때, 그때는 라코스테 악어가 왼쪽 가슴에 새겨진 네이비 카디건을 교복 위에 입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웃기지? 정말로 그랬단다.) 창가에 서서 그 카디건을 툭툭 두드리며 먼지를 털던, 머릿결이 좋던 반 친구가 내 눈에는 그렇게 예뻐 보였어. 나에게는 그런 카디건도, 머릿결도 없었거든. 20살 때는 대학교 입학 MT를 떠나는데, 누가 봐도 친오빠가 메고 다니던 낡은 농구 가방을 어깨에 무심하게 툭 걸치고 버스에 올라타는 친구의 모습이 어딘가 쿨해 보였지. 드라마에 나오는 담백하면서도 은근히 따뜻한 '서울 가족'의 막내딸 같았어.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외로이 지내는 나와는 달리 말야. 지금까지도 기억날 만큼 (나에게만은 참으로) 매력적인 짤따란 장면을 찰칵, 하고 마음에 찍어두고 그 뒤로는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좋게 상상했단다. 그리고는 시나브로 그들의 일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기 시작하는 거야. 아주, 아-주 좋은 쪽으로만.


'덴귀르데네프레덴 (The golden peace)' 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오랫동안 엄마의 넘버원. 아, 다시 갈 수 있을까.


     이것도 취미라면 취미. 어떠한 스킬이라면 스킬. 혹시 너도 나의 이런 점을 닮았다면, 한 가지 당부할게. 주의해! 그들의 가장 빛나는 오후 3시의 모습과 나의 가장 어두운 밤 11시를 절대로 비교하지 말 것. 왜냐면 말이야,  vice versa (봐이-스 붤-사: 거꾸로 생각해봐도 똑같겠지). 제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도 하루 종일 그럴 수는 없으니. 스톡홀름 사람들도 찬란하게 빛나는 잠시 잠깐의 오후 3시를 뒤로하고, 마침내 도착한 직장이나 집에서는 우리처럼 남루하게 일상을 살아내느라 고생이 많을 것이 분명하거든. 내가 장담할게. 오후 4시에는 정치인들 이름으로 가득한 시사 라디오가 켜져 있을 테고, 5시에는 늘어지게 답답한 상사와 싸우고 있거나 더 답답하게 멈춰버린 윈도우와 씨름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6시에는 신발 밑창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양말 때문에 괴롭고, 7시에는 어제 먹다 남은 수프를 눅진하게 다시 데워서 뻔한 저녁을 해치웠을거야. 그렇게 밤이 되면 테이블 위에 스탠드를 켜놓고 구겨진 영수증을 펼치며 계산기를 두드릴 게 뻔하다. 집안 곳곳에 낡은 세탁물이 널려있고, 여기저기 전선들이 꼬불거리며, 또 모르지. 지지고 볶으며 그릇 깨지는 소리가 그 위에서 흐르고 있을지도. 이렇게 그들의 가장 초라한 모습과 너의 어느 가장 빛나는 모습을 거꾸로 비교하면, 결국 서로 꼬르륵, 마음이 고픈 것은 똑같기 때문에. 괜한 착각으로 자존감을 구길 필요가 없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 찬란하게 빛나는 스톡홀름의 오후 3시.


     모든 것이 찬란하게 빛나 보였던 스톡홀름의 오후 3시. 그 빛들이 결국은 나의 꼬질꼬질함 까지도 숨김없이 다 비춰주던 그때를 돌아보며. 또 언젠가는 나와 남을 비교하는 사춘기 소녀가 될 너를 미리 내다보며. 너의 곱슬머리가, 볼록한 짱구 이마가, 두터운 손이, 작고 넓은 콧볼이 그리고 또 앞으로 스스로 발견할 그 무엇이든지를, 다른 누군가의 짧게 빛나는 모습과 비교하지 말길 바란다. 나는 너의 그런 점 하나하나 때문에 너를 마음 깊이 사랑하며 오래도록 뽀뽀를 퍼붓고 있으니까. 특히 요즘은 자신의 빛나는 찰나만을 잔뜩 전시해두는 SNS의 시대니까. (너의 소녀시절에는 어떤 네트워킹 서비스가 새로 등장할지 모르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외모, 분위기, 학벌, 돈, 스펙, 배경 때문에 혹시라도 마음 한 구석에 꼬르륵하는 시장기가 느껴지거든 꼭 기억해. Vice versa. 그 사람들도 어느 오후 3시, 빛이 쏟아지는 너를 스쳐 지나가며 이렇게 생각할 거야. 왠지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좋아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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