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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writes Mar 23. 2016

워싱턴 DC의 오후 3시

2009년 가을 겨울


안녕, 딸! 오늘은 워싱턴 DC의 오후 3시에 대해 말해줄게.

워싱턴 DC는 엄마와 인연이 아주 깊은 곳이야.

엄마가 스물세 살일 때,

워싱턴 DC의 American University에서

공부를 하며 한 학기를 보냈거든.

이 곳에서 보낸 수많은 오후 3시는

엄마의 소중한 재산이란다.



대학 시절의 배낭여행이나 어학연수는

이제 누구에게나 흔해졌지만

내가 경험한 그 도시의, 그 시간들은

유난히 반짝반짝 빛나는 법이란다.

바다에 가면 널린 것이 조약돌이지만

주워다가 나의 서랍 속에 넣어둔 것만은

다르게 기억되는 것처럼 말이야.


대학 캠퍼스의 반짝이던 시간으로

엄마가 되돌아갈 수 있을까?

잠깐이라도 그럴 수 있다면,

그 시각은 오후 3시였으면 좋겠다.



고백하자면 엄마는 그 시절에,

성실한 대학생은 아니었어.

엄마는 영문학을 전공했단다.

그래서 읽을 것도, 외울 것도 아주 많았어.

하지만 단 하나도 제대로 읽거나 외운 것이 없단다.

(이건 절대로 자랑이 아니다, 딸아.)

교수님이 읽어보라고 한 자료를

단 한 번도 꼼꼼하게 살펴본 적이 없었어.

늘 시험 전날까지 딴짓을 하다가

어차피 지금 밤새워도 늦었다며 일찍 잠들었단다.

다른 학생이라면, 밤새워 무언가를 외웠을 시간에 말이야.

그리곤 책 표지에 적혀있는 짧은 설명들

가령, '의식이 흐르는대로 써 내려간 여성문학'

'영국 모더니즘의 정수'

정도만 체크하고는 그것을 기준으로

시험지 가득 내 생각을 써 내려갔단다.

마치 백일장에 나간 사람처럼 말이야.

묻지 마라, 당연히 성적은 엉망이다.



시키는 대로 차곡차곡 성실히 하는 것.

읽으라는 것을 읽고, 외우라는 것을 외우는 것.

너도 나를 닮아서 그런 것을 끔찍이도 싫어할까?

나중에 마음이 바뀔진 몰라도, 지금은 있잖아 얘야.

나는... 네가 날 닮았으면 좋겠다.

왜냐면, 사실은...

시키는 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거든!


엄마는 수업이 끝난 오후 3시쯤이 되면,

어려운 영문학 책 따위는 덮어두고

거리를 걸으며 사람들을 많이도 관찰했단다.

그들의 평범한 오후 3시가

내 눈에는 드라마 같고, 소설 같고,

결국엔 덮어버린 영문학 책 한 권 과도 같았지.

나중에 네가 무엇을 전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 지루한 책일랑 덮어버리고,

진짜 세상으로 들어가 보는 씩씩함을

나에게 보여주렴.

나는 그런 너를 혼내지 않고, 손뼉을 쳐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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