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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세상의 오후 3시를
By Sol writes . Jul 26. 2016

삿포로의 오후 3시

2013년 겨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샤신 토라나이테쿠다사이. 사진 찍지 마세요. 앗, 미안해. 정말 멋진 아이다. 


안녕, 나의 딸. 네가 태어난지도 3개월. 정확히는 106일이 지났다. 네가 나의 뱃속에 봉긋하게 차오를 때부터 엄마는 너에게 해 줄 작은 이야기들을 모으고 있었단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아가씨였을 때, 새댁이었을 때.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느낀 오후 3시의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조금씩 모아 온 오후 3시에 대한 이야기들. 이제는 뱃속 어두운 곳에서 자고 있는 모호한 누군가에게가 아닌 바로 나의 옆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구체적이고 또렷한 눈, 코, 입을 가진 누군가에게 들려준다고 생각하니, 타자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서두가 길어지는 것도 아마 그런 탓인가 보다.


삿포로의 눈길을 걷는 엄마를, 아빠가 사진으로 담았다.


오늘은 삿포로의 오후 3시에 대해 말해줄게. 아빠와 엄마가 연애하던 시절. 너의 아빠도 엄마도 아니었고, 서로의 남편과 아내도 아니었고, 그저 비밀스러운 남자 친구이자 여자 친구였던 시절. 그러니까 그때, 처음으로 함께 떠날 여행지로 우리는 삿포로를 꼽았단다. 그래서 그런지 삿포로를 떠올릴 때마다, 엄마는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어. 적어도 아빠와 엄마에게는 풋풋한 사랑의 도시이지.


삿포로의 한 맥주 공장. 쌓인 눈 위로 빛이 쏟아졌다. 강한 햇빛도 눈을 깨뜨리진 못했다. 


그때 삿포로는 크리스마스였고, 눈이 쌓여있었고, 또 평화로웠단다. 우리가 함께 보낸 삿포로의 오후 3시도 그대로였어. 나란히 걷는 모든 골목마다 조용함이 있었고, 깨끗함이 있었지. 나의 눈이 닿는 곳마다 두껍게 쌓인 하얀 눈들이 아름답게 과장되어 보였단다. 눈내린 겨울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말이지.이것은 과연, 둘이 처음으로 함께 떠난 데이트 같은 여행이었기 때문일까? 나의 옆에서 함께 걷던 남자 친구, 그러니까 너의 아빠의 눈에도 그랬나 봐. 아직도 삿포로를 아주아주 좋았던 여행지로 꼽거든. 너도 중학생이 되고, 여고생이 되고, 여대생이 되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겠지. 그 누군가도 비슷한 마음을 비슷한 크기로 갖게 된다면 같이 손을 잡고 가깝고 먼 거리의 데이트를 하게 될테고. 먼 나라로 떠나, 무엇과도 바꾸기 싫은 오후 3시를 보내기도 하겠구나. 그 기분 좋은 오후 3시의 일들을 여자로서 상상하는 것과, 엄마로서 상상하는 것이 미묘하게 다르다. 어쨌든 그 마음은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애틋한 감정이니 빛나는 청춘의 마디마다, 꼭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삿포로에는 길 건너에, 골목 너머에, 깨끗함과 조용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애틋한 감정을 느낄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기는 아주 어렵단다. 유행가 가사나 영화 대사에서는 '한눈에 반했다'라고 참 쉽게도 말들 하지만. 한눈에 반하고 나면, 그 뒤에도 계속 반해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어느새 저울질하게 되거든.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래. 근데 그 저울질이야말로 세상 가장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동창회 같은 곳에 나가보면 알게 될 거야. 제 아무리 영어 수학 논술 100점을 받던 똑똑한 친구들이라 해도 그중 몇몇은 '정말로 좋은 사람 만나기'라는 문제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있을 테니까. 그건 문제집처럼 많이 푼다고 실력이 느는 것도, 맨 뒷장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 당장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을 찾는 걸 말하는 게 아니란다. 그건 쉬워. 누구나 할 수 있어. 그 사람이 가진 자동차나 옷, 명함이나 구두가 힌트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가씨야. 나중에 엄마의 나이가 되거든 삿포로의 오후 3시를 이야기하며 삼천포로 빠졌던 이 대목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너는 지금 당장에 빛나는 남자를 찾는 게 아니라는 걸. 10년 뒤, 20년 뒤에 너와 함께 빛날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삿포로의 눈길을 걷는 아빠를, 엄마가 사진으로 담았다.


엄마는 정답을 맞혔냐고? 글쎄. 정답 같은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어디선가 성적표를 받게 된다면 

더 또렷하게 알게 되겠지. 너도 함께 보겠구나 나의 성적표를. 사실 엄마는 지금까지도, 아빠라는 사람을 아주아주 좋아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분이 눈처럼 하얗게 쌓이거든. 그리고 그 좋은 기분 끝에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별 걸 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말이다. 아마도 이 마음의 시작은 삿포로의 오후 3시.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길을 앞장서던, 짧은 머리의 청년에게로부터 였던 것 같다.



오후 3시가 되도록, 눈이 녹지 않는 조용한 도시. 


너에게도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때가 오겠지. 1,2,3,4,5번 중에 뭐라도 하나 빨리 찍어야 할 것 같은 그 조마조마한 타이밍에 절대로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말기를. 부디 좋은 짝과의 여행을 떠날 여유가 주어져서 '아 맞다. 이거지!' 혹은 ' 아 이건 절대로 아니구나' 하고 마음 속 정답을 조용히 확신할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그 확신에는 유난히 마음이 편안해지고, 얼굴은 빛나게 되는 오후 3시의 기쁨이 힌트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응원할게, 여자 김로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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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딸에게 세상의 오후 3시를
카피라이터 박솔미
문장과 문장 사이로 건네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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