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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순준 Nov 25. 2022

후회의 복리

<창밖은 겨울>


사회에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유통된다. 여럿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실패자, 낙오자, 출발선에도 서보지 못한 자가 있을 터인데도, 사회에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성공한 자와 곧 성공할 자들의 쩌렁쩌렁한 음성이 시민들의 고막을 독차지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여백은 멘토, 동기유발 강사, 천공과 같은 교주 등의 말로 금세 채워진다. 결국, 수렁에 빠진 이들의 사연은 전해지지 않는다.


몰락한 자가 주인공이 되는 몇 안 되는 영역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파산신청을 받지 않는다. 면책의 권한도 없다. 복지 혜택도 주지도 못한다.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과 공명할 뿐이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예술은 실패한 자들의 사회가 세워지는 데에 이바지한다. 당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그 사정이 매우 특수하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당신은 다른 누군가와 통할 수 있다고 예술작품은 말한다.


<창밖은 겨울>도 이러한 일을 해낸다. 필름에는 후회, 미련, 무력감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지 않다. 영화는 석우(곽민규)와 영애(한선화)가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처방하지 않는다. 처방은커녕 암시조차 없다. 묵묵히 그들을 보고, 들을 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둘 모두가 후회라는 덫에 사로잡혀 있음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때에 회한의 진탕 속에서 허우적대는 어떤 관객이 그들과 동화될 것이다.


버스기사 석우가 목적지로 나아가지 못하고 로터리를 뱅뱅 돈다. 옛 애인의 손길이 닿은, 끝없이 왕복 운동하는 추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두운 방에서 탁구공을 벽에 튀긴 후에 잡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터트린 탁구공이 이미 여럿인데도 말이다. 영애는 정해진 노선에서만 공을 움직여야 하는 탁구에 빠진 듯하다. 석우와 영애는 MP3를 수리하기 위해 길 안내를 받는데, 가는 방향이 돌고, 돌고, 돌아, 이다.


이제 관객은 석우와 영애가 후회 또는 미련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후회와 미련이란 여기, 지금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고, 끝없이 과거로 향하게 하는 정서임을 인식하게 된다. 지나간 때로 떠밀리면서, 석우와 영애 그리고 후회하는 누군가가 온 기력을 소진함을 깨닫게 된다. 여력이 없기에 타인의 말을 들을 수도 없고, 타인과 함께할 수도 없게 됨을 알게 된다. 후회의 사슬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작품은 신경안정제 자낙스나 수면제 졸피뎀에서 희망을 찾지 않는다. <창밖은 겨울>에서 후회, 불안, 절망, 외로움은 뽑혀야 할 잡초가 아니라, 관리되어야 할 작물처럼 다뤄진다. 석우와 영애가 서로를 묵묵히 바라본다. 카메라도 석우와 영애를 바라본다. 근조 화환보다 왜소함에도 불구하고 유족에게 더 큰 힘을 주는 조문객처럼, 때로는 대책 없이 옆에 있는 사람 덕에 우리는 위안을 얻곤 한다. 그렇게 후회의 우정이라 할 만한 관계가 시작된다. 석우와 영애에게서, 그들과 관객에게서. 나 같은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자각에서 시작되는 연대다.


영화의 엔딩. 석우와 영애가 카메라를 등지고 걷는다. 석우는 영애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후회에서 비롯된 고립 상태를 깨준 것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정해진 시공간을 오가는 버스, 제한된 공간에서만 움직이는 탁구공, 한정된 운동만을 되풀이하는 추와 달리 석우와 영애는 이제 정해진 프레임, 즉 스크린 화면을 벗어난다. 그들의 등이 점점 작아지는 건 이들이 순환과 되풀이란 제약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할 것이다.


후회로 인해 초점이 과거에 고정된 사람들, 그리하여 현재를 놓치는 사람들, 흘러간 것에 대한 아쉬움에 사로잡혀 눈앞의 것까지 망치는 사람들, 다시 말해 후회의 복리 효과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러한 이들에게 영화는, 창밖의 계절은 계속해서 바뀐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자기가 예전에 만든 영화를 마침내 보게 된 석우처럼, 진저리 쳤던 탁구채를 다시 잡는 영애처럼, 우리도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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