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 강의를 나갔을 때의 일이다.
성별로 차별받은 경험을 나누는 시간에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이 다 태권도 다녀서 저도 태권도 학원 가고 싶다고 말하니까 아빠가 안된다고 했어요."
"아빠가 왜 반대를 했을까요?"
"아빠가 이렇게 말했어요. 너는 여자니까, 여자아이는 피아노를 배워야지."
내가 뭔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학생들 입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너무하다는 한숨섞인 속삭임들 사이로 "그건 차별이야!"라는 힘있는 목소리도 들렸다.
웅성임 속으로 햇살이 비쳐들었다.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자그마한 소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키는 작지만 뒤쪽 자리에 앉은 그 아이는 올곧은 자세로 앉아 나를 보고있었다.
나는 몇 초간 빛나는 그 눈동자를 마음 속에 담았다.
전해 주고 싶은 말들이 뒤죽박죽 엉켜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랬군요. 혹시 그 때 학생 기분은 어땠을까요?"
"그냥 그랬어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피아노 학원을 갔나요?"
"아니요. 근데 피아노도 싫어하진 않아요. 태권도가 더 좋았던거지."
목소리 주위로 햇살이 어루만진 커튼 그림자가 일렁였다.
마스크 아래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곧게 편 허리와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강렬했다.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내 눈빛을 피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게 조금 멋지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흐르던 시계바늘 속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빠가 어떻게 말했다면 더 좋았을까요?"
"니가 좋아하는 걸 해,라고 말해주면 좋았을거에요."
강의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그 대화가 자꾸 떠올랐다.
해주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차별하지 말자고 가르치지만 그들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력한 나 자신을 발견했기때문이다.
그건 분명 내 영역 밖의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초등학생들은 약자다. 나는 약자를 상대로 차별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당할땐 어떻게 해야 하나.
무척 우울해졌고, 스스로에게 잔뜩 실망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그 날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일렬로 앉아있는 학생들 사이 반짝이는 눈동자.
약간은 체념한 듯 괜찮다 말하는 목소리.
그리고... 문장으로 뭉쳐지지 않았던 수많은 말들. 강사로서 한계를 느꼈던 그 순간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어른들이 문제에요 그렇죠?
그러나 그가 양육자와 갈등을 겪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절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초등학생들이 차별과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나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받아들이고 체념하라거나 혹은 싸우고 쟁취하라는것 이외에...
(어른들을 이해하라는 말은 죽어도 하고싶지 않다. 어른들이라고! 이해는 어른들이 하는거지, 어린 아이들이 해 주는게 아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상황에서 아이들은 '부모님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거야...네가 이해하렴. 너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건 아니란다, 알지?'와 같은 헛소리를 충분히 많이 듣고 있을터다.)
사실 그들이 할 수 있는건 없지 않나?
내가 할 수 있는것도 없지 않나?